콜 포비아(call phobia)
나는 예전부터 전화를 하고 받는걸 좋아하지 않았다. 친구들 심지어 가족까지 핵심 용건만 말하고 길어야 5분이상 전화를 하지 않는 편이다. 직접 만나서 얘기하면 몇시간 동안 즐겁게 얘기 할 수 있지만 전화기를 사이에 두고 말하는건 불편했다.
인턴시절에 팀원분들이 회의에 들어가는 경우 전화가 오면 종종 땡겨 받아야 하는 일이 있었다. 전화를 싫어하던 나에게는 팀원분들이 부재일때 "안녕하세요 대신받았습니다. 00회사 00부서 00인턴입니다." 이 한마디 말하는게 너무 힘들었다. 그리고 초반엔 전화하면서 내용을 적는걸 잊어버려 누구인지 무엇 때문에 전화를 했는지를 물어봐 놓고 전화를 끊으면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곤했다.
광고회사의 주된 커뮤니케이션
다른 직종, 직무에서 전화를 많이 사용하지 않는 경우도 있겠지만 광고회사에서는 메일은 당연하고 주된 커뮤니케이션이 전화로 이루어진다. 광고주와 그날그날의 주된 이슈와 업무에 대한 조율을 위해 전화커뮤니케이션은 필수사항이다. 그래서인지 광고회사의 JD(job description)에는 광고주와의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이 꼭 들어가 있는 경우가 많다. 처음 광고회사에 입사했을 때 주로 전화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걸 보고 전화를 싫어하는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굉장히 많이 들었다.
광고주 외에도 같이 협력해서 일하는 타부서와 협력사와 전화를 해야할 일도 많다. 연차가 낮을 때는 주로 광고주보다 타부서나 협력사와 커뮤니케이션 할 일이 더 많다. 연차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전화 업무가 너무 맞지 않아서 광고업이 나와 맞나라는 고민을 굉장히 많이 했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언제부터인가 그렇게 전화를 싫어하던 나도 뻔뻔하게 전화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대형 광고주를 담당하는 경우 광고주와 커뮤니케이션은 주로 연차가 높은 사람이 맡게 되며 키를 잡고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 광고주는 1~2명인데 전담팀에는 최소 10명에서 많게는 20명까지 있다보니 효율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각 실무를 담당하는 파트별로 파트장이 광고주와 커뮤니케이션을 하게 된다. 어느정도 전화에 적응됐다고 생각했던 나는 연차가 쌓이고 광고주와 키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하게 되면서 커뮤니케이션 하는것 자체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왜 전화가 커뮤니케이션이 싫을까?
전화가 무서운 이유중의 가장 큰 이유중 하나는 상대가 어떤걸 물어볼지 모르는 불확실성 때문이다. 회사의 전략 광고주이지만 까다로운 광고주를 담당하게 되었을 때 담당 광고주에게 전화가 오는게 무서웠다. 출근하자마자 전화가 오거나 혹은 1시간에 연속으로 5번이상 전화가 올때 전화가 오면 가슴이 너무 두근거렸다. 어떤걸 물어볼지 몰라서 이에 대응하기 위해 관련 메일과 파일을 모니터에 다 띄워놓고 전화를 받곤 했다. 굉장히 논리적이고 항상 허를 찌르는 질문을 많이 했던 광고주였기에 전화를 하고나면 진이 다 빠졌다.
업무할 때 전화가 무서운 이유중 하나는 상대가 어떤걸 물어볼지 모르거나 모르는걸 물어봤을 때 스무스하게 넘어갈 수 있는 순발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순발력이 부족하다. 상대가 모르는걸 물어봐도 아는 선에서 최대한 대답하거나,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 답해주겠다고 시간을 벌어야한다. 모르는걸 물어봤을 때 모르는 티가 너무 나면 광고주 입장에서는 담당자에 대한 전문성과 신뢰에 대해 의심이 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튀는걸 좋아하지 않거나 내성적인 사람이라면 공감할 전화가 무서운 이유중 하나는 전화를 하거나 받음으로써 사무실내 조용한 적막을 내가 깨야 하기 때문이다. 조용한 사무실에 전화벨이 울려 통화를 하게 되면 팀원들은 내 얘기에 집중하게 된다. 이 때 내가 광고주에게 쩔쩔 매는 모습이나 프로페셔널 하지 못한 커뮤니케이션을 남에게 들킬까봐 너무 조용할 때 오는 전화가 싫었다.
전화 공포에 대처하는법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화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한 이유는 텍스트상의 오해의 소지를 어느정도 해소시켜 미스커뮤니케이션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텍스트로만 상대에게 전달하면 전체적인 상황과 맥락을 모두 전할 수가 없어 오해의 가능성이 있다. 텍스트로 다 다을 수 없는 내용이나 상황 설명을 할 수 없을 때 의외로 전화를 통해 커뮤니케이션 하면 스무스하게 넘어가는 경우가 있다. 또한 상대가 텍스트로 무얼 원하는지 알 수 없을 때 혼자 해석하느라 끙끙 앓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것 보다 명확하게 전화로 물어보아 시간낭비를 줄일 수도 있다.
업무상 전화는 불가피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다. 따라서 전화 공포를 완전히 없앨 순 없겠지만 대처하는 방법으로는 위에서 말한 불확실성을 줄이고 순발력을 키우는 것이다.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 항상 상대보다 더 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해 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상대방과 일하다 보면 어느 정도 스타일이 파악돼서 어떤걸 궁금해 할지 파악이 된다. 이러한 질문을 생각해 놓고 해결방안을 하나만이 아니라 두개 세개 생각해 놓는다면 어느정도의 불확실성을 해소할수 있고 자신감도 생긴다.
순발력의 경우 시간이 답인 경우가 있다. 아무리 순발력이 있는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라면 이를 발휘 할 수 없다. 다양한 광고주 그리고 사람들을 만나보면서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 노하우가 쌓이고 업무 경력이 쌓여 상대보다 많은 걸 알게 된다면 순발력은 충분히 발휘된다.
마지막으로 나 뿐만 아니라 업무상 전화를 어렵고 무서워하는 사람도 많다는 걸 알아야 한다. 광고주와 커뮤니케이션 하며 나만 쩔쩔메고 이 일이 안맞다고 생각 할때 다른 파트 동료도 나와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되었다. 그 동료는 광고주와 전화 할때 막힘없이 해서 나와 같은 전화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고민이 없는 줄 알았지만, 전화오는게 제일 싫다고 했다. 다른사람도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위안이 되면서 좀더 자신감 있게 전화에 대처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연차가 쌓이면서 광고주 혹은 타부서 등 다양한 사람들의 전화가 처음보다 공포스럽진 않지만 아직까지 전화가 오는게 편하거나 반갑진 않다. 독서를 할 때 벽돌책이 있다. 벽돌책을 하나씩 깨다 보면 그외의 다른 책을 읽을 때 쉬워진다. 벽돌같은 광고주를 만나서 시달리다보면 배우는 점도 많기도 하지만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다른 광고주들 만났을 때 무난해 보일 때도 있다. 앞으로 광고회사에서 일하며 어떤 벽돌 같은 광고주를 더 만날지 모르겠지만 전화 공포증은 일하면서 계속해서 가져가야할 숙제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