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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더혜숙 May 27. 2024

미운 오빠들

연말에 우리 집에 손님이 왔다. 남편의 옛날 동료는 브라질 인이고 그의 아내는 독일인이다. 우리는 십몇 년 전에 처음 만나고, 각자가 아이를 낳고 한 번, 이번이 세 번째 만남이었다. 유쾌한 남자와 조용하고 배려심 깊은 여자의 커플이다. 여자의 이름은 얀나이다. 독일 여자 이름들은 보통 a로 끝나는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름은 한나(Hannah)고, 그 이름 다음으로 좋아하는 이름이 얀나다. 내가 아는 유일한 얀나이기도 한 그녀의 이미지는 얀이라는 그 상냥한 어감과 a가 따라오면서 '나'의 비음이 나서 그녀와 잘 어울렸다.


처음부터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이것저것 내 행동을 살피고 잘 챙겨주던 그녀가 좋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세 아들의 엄마가 된 얀나는 그 남자 짐승 우리 속에서도 고성 한번 지르지 않았다. 차분하게, 다정한 엄마의 역할을 했다. 게다가 남자 애 셋이 무슨 일만 일어나면 엄마한테 쪼르르 달려가는 그런 엄마 나무에 매미였다. 


그들이 우리 집에 머무는 4일 동안 대화를 많이 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우리 손에는 맥주 병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형제 자매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 거다. 남자에게는 누나가 있고, 그들을 가끔씩 찾아간다는 이야기를 했다. 얀나에게는 오빠 둘이 있고,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오빠를 불러서 도움을 청했다고 했다. 든든한 오빠 둘이 있으니 동네에서 코를 높이 쳐들고 다녔다고. 


‘너는 정말 행복한 여자 아이였구나!’하고 부러워했다. ‘어쩌면 너는 오빠들의 학대를 경험해 본 적이 없겠지.’라고 나는 중얼거렸다.  

“내 오빠는 나보다 여섯 살이나 많았는데 학교 다녀오면 나한테 라면 끓이라고 심부름을 시켰어. 안 한다고 버티면, 당시 오빠는 합기도를 배웠는데 그 유연한 발차기를 내게 써먹었지. 발을 내 얼굴까지 올리고 ‘찰까?’라고 협박했어. 나는 오빠가 너무 싫었어.”

“동네에 내 또래가 없었어. 오빠들이랑 놀고 싶었는데, 오빠 둘과 뒷동네에 다른 오빠가 어울려 놀았거든. 어디든 나도 갈래. 그러면 서로 얼굴을 보고 싱긋이 웃어. 나를 따돌리고 사라져가며 웃는 그들의 비웃음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어.”라고 내가 말했다.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는 얀나의 표정을 보며 덧붙였다. 


“지금은 커서 괜찮지만….” 그런 나쁜 기억을 고백하고 상대방의 침묵과 그 어색함을 못 견디는 나는, '괜찮다'라는 말을 급하게 뱉었다.   


나와 오빠들은 이제 사십이 넘었다. 내게는 아직도 엄마가 못해준 기억들,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 기억들이 있다. 글을 쓰면서 그 반대 기억을 기억해 냈다. 엄마에 대한 기억은 글에서 맞출 수 있었다. 오빠에 대한 기억은 어떨까. 어쩌면 <가을 동화>의 준서 오빠 같은 이상적인 모습을 내 오빠에게 덧입힐 수 있을까. 



오빠들이 어린 나를 귀찮아하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큰오빠와는 여섯 살, 둘째 오빠와는 세 살 차이가 났다. 어린 여자아이(초등 1, 2학년 때)가 따라오면 속도도 늦어지고, 어쩌면 걱정이 되어서 하고 싶은 놀이도 못할 수도 있었다. 나는 혼자보다 오빠들이랑 같이 노는 게 좋았다. 그들은 동네 구석구석을 쑤시고 다녔다. 산에도 올랐고 강가에 가서도 놀았다. 그들의 사악한 웃음소리가 나의 것도 섞고, 손발이 새카매지도록 노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좋았다.  


“오빠, 나도 갈래.” 어디로 간다고 했는지는 못 들어도, 나는 어디든 따라가고 싶었다.  


오빠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묵묵부답이 가장 싫었다. 점점, 나도 그것이 거절의 의미가 담긴 침묵이라는 걸 알아갔다. 오빠 둘은 슬금슬금 마루로 나가고 섬돌의 신발을 재빨리 찾아 신고 마당으로 나갔다. 

나는 어렸지만 동작이 빨랐다. 금방 신발을 구개 신고 그들을 따라나섰다. 그들이 데리고 간다고 하건, 말건 일단 따라나서야 무료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동네 어귀를 돌 때 오빠들이 사라졌다. 담장 위로 올라갔는지, 뒤 동네로 넘어갔는지 모르겠다. 잠시 후 키득키득 거리는 소리가 담장 너머로 들렸다. 그들은 나를 따돌린 것이 신이 나서 웃었다. 


좁은 동네에서 그들이 갈 곳은 뻔했다. 강 건너 옆 산 대나무 숲, 강 건너 물가 버드나무 그루터기, 다리 앞의 굿판이 벌어지던 너럭바위, 뒷동네 저수지, 앞산과 사과나무 밭 뒤의 동네 오빠 집이었다. 그들은 여름이면 산과 들에서 수박이나 햇자두를 서리했다. 겨울이면 앞산 그늘에서 눈썰매를 탔고, 어떨 때는 동네 보에서 얼음 썰매를 탔다. 그때는 여름이었다. 나는 오빠들이 강 건너에서 노는 걸 발견했다. 


어려도 오래 걸려도 나는 어디든지 갈 수 있었다. 동네에서 강을 내려보면 아찔했다. 5미터는 되는 낭떠라지 벽에 호두와 밤이 자랐다. 호두는 잎이 무성했고, 밤 나무에서는 향이 진한 금발 레게 머리 같은 꽃이 폈다. 뒤 동네 아주머니가 보일까, 누구를 만날까 몸을 숙이고 빨리 걸었다. 도랑에는 물이 불어서 빨래터가 반쯤 잠겼다. 다리를 건너고 오른쪽으로 틀면 왼쪽 대나무밭에서 대 잎 스치는 소리가 났다. 오빠들의 웃음소리가 거기까지 들렸다. ‘나도 데려가서 놀지.’그들을 미워하는 마음과 같이 놀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오빠들 뭐해?”라고 물었다. 대답을 해줄 리 없다. 두터운 버드나무 여러 줄기를 뭉쳐서 밧줄로 묶었다. 그 아래는 경운기 쟁기를 달아 놓고 거기에 올라탔다. 누가 매달린 사람을 밀어주면 멀리까지 같다가 흔들흔들거리며 늘어진 포물선을 그렸다. 물론 오빠들은 그러기도 전에 떨어졌지만, 한 사람이 떨어지면 그다음 사람이 탔다. 


“오빠 나도 한 번만 타자.” 내가 물었다. 


“너는 어려서 안 돼.” 작은오빠가 말했다. 


“우리, 여기 노는 거 어떻게 알았어? 귀찮게 왜 따라와 가지고는.” 큰오빠가 짜증을 냈다.


“오빠, 그래도 한 번만 태워줘.” 나는 묻고 또 물었다. 


“쟤, 시끄럽다. 한번 태워주면 조용하겠지.”라고 뒷 동네 오빠가 말했다. 언제나 남의 오빠가 친 오빠보다 더 친절했다. 


“가시나야, 어서 타!” 큰오빠가 마지못해 허락했다. 


내가 쟁기에 올라서자 오빠 둘이 내 등을 밀어 마지막에 다리가 닿지 않은 곳에서 쑥 밀었다. 가벼운 내 몸은 쟁기에 실려서 높이까지 올랐다. 비 온 후, 버드나무뿌리까지 적실 만큼 강물이 불었다. 발아래서 바람에 찰랑거리는 물이 보였다. 볼에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상쾌했다. 그 순간, 떨어졌다. 재밌었는데 아쉬웠다.

“오빠, 한 번만 더 밀어줘.” 

오빠가 한 번 더 태워줄 리는 없었다. 그들은 나를 무시하고 자기들끼리 신나게 날이 저물 때까지 쟁기 그네를 탔다. 


 


유치원생 때 엄마가 파마를 시켜줬다. 엄마처럼 읍내 미용실에서 한 시골스러운 뽕양한 파마였다. 파마를 한지 얼마 안 지나서 머리가 물에 젖으면 뽀글뽀글했다. 파마약에 탈색됐던 것인지 머리색은 약간 노랬다. 머리가 자라면서 사자 갈기 같다고 유치원 친구들이 나를 놀렸다. 재미로 그랬던 건지, 짜증이 나서 했던 건지, 한 번 ‘어흥!’ 해 줬더니 애들이 비명을 지르고 좋아서 도망갔다. 그 이후로 나는 묵찌빠를 생략하고 영원한 사자 술래로 남았다. 나를 볼 때마다 '사자다' 하고 도망가는 꼴이 아직도 기억나는 걸 보면, 어릴 적 상처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종이 위에 진하게 남아서 절대로 지워지지 유성 마크 같다.  


엄마가 나를 딸이라고 신경을 써줬던 건지 나는 수영복다운 수영복을 입고 수영 튜브를 허리에 걸치고 찍은 사진이 있다. 내 머리는 파마의 컬이 살아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이나 2학년 즈음의 여름, 햇빛이 쨍쨍한 날이었다. 


그 더운 여름, 아지랑이가 오르는 신작로를 건너 산 만디(산마루)에 있는 수박밭에서 수박 두 덩이를 가지고 강가에 갔다. 강가 바위에 턱하고 수박을 내리쳐서 깼다. 주르륵 흐르는 수박 즙을 그대로 입으로 쪽쪽 빨아먹고, 하얗게 질린 수박을 양 볼에 검은 수박 씨를 묻히고 허겁지겁 먹었다. 바로 수영을 할 것이라 찐득해지는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오빠 나 이것 좀 쪼개 줘.” 내가 어린 여자아이의 어리광을 부렸는지는 모르겠다. 아님 내가 그걸 악다구니 있게 쪼개서 얼른 입에 넣었는지. 오빠들이 먹기 전에 내가 먼저 더 많이 먹어야 하니깐. 그들은 내가 어린 동생이라고 해서 기다려 주는 일이 없으니깐. 후자에 가까우리라. 


수박을 먹고 배가 빵빵하게 불렀다. 바위에서 강으로 다이빙을 했다. 그러다 심심해지면 바위 사이에 바글바글 검게 붙어 있는 고동을 손으로 시원하게 긁어냈다. 모래 속에 숨어 있는 모래색의 큰 고동을 건져내면 부자가 된 것 같았다. 입술이 저승사자처럼 시퍼레질 때까지 수영을 하다가 도저히 추워서 안되겠으면 바위 위에서 몸을 말렸다. 뙤얕볕에 달궈진 바위는 속도 따듯했다. 바위에는 흰 새 똥도 있었고 모래도 있었다. 입으로 후 불어내다가 손으로 그림을 그리다가 다시 몸이 따뜻해지면 물에 들어갔다. 몇 시간이고 물속에서 놀고 나니 노곤해졌다. 해는 이미 식었다. 수박 먹는 배는 다 꺼지고 배도 고팠다. 덜덜 떨면서 수영 튜브는 허리에 걸치고 걸었다. 강에서 나와 길로 올라서면 길 벽이 2. 5m로 높았다. 다리까지 이어진 길은 계속 높아졌다.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척척 걸었다. 잠시 졸았나 보다.머리에 미약한 통증을 느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내가 길 벽 밑 바위에 누워있다. ‘이게 뭔 일이지?’ 머리맡에 있던 돌멩이는 두 동가리(토막) 나 있었다.


머리가 아팠다. 반사적으로 머리에 피가 나는지 문질렀다. 뒷통수가 불룩하게 부었다. 욱신거렸다. 벽 위에서 오빠 둘이 웃는 게 보였다. 저것들은 내가 이렇게 높은 데서 떨어졌는데 괜찮냐고 묻기보다는 떨어진 걸 고소해하고 있었다. 그들이 비웃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더 누워 있으면 안 되었다. 괜히 눈물이 났다. 추워서 덜덜 떨었다. 그렇게 울면서 집에 왔다. 그렇게 집으로 와서 저녁도 먹지 않고 바로 잤다.  


정확한 버튼을 누르면 탁하고 튀어나오는 포스기 서랍처럼 기억을 상기시키는 핵심을 잘 잡으면 기억들은 언제든지 생생하게 톡톡 튀어 오른다. 그 기억 속 상처들이 언제까지 나를 개처럼 물어뜯을지는 모르겠다. 치유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기억들을 쓰지 않고서는 안 되는 내적 충동 때문에 어린 시절의 기억을 꺼낼 수 있을 만큼 꺼내려고 한다. 옛날에 내가 말이야,라고 어릴 적 기억을 꺼내고 또 꺼내는 할머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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