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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더혜숙 Jun 05. 2024

엄마의 돌절구


신혼 때, 브라질 시댁에서 한 달 동안 기거한 적이 있다. 매일 오후 네 시면 스콜성 폭우가 쏟아졌다. 비가 그치면 수로가 잘 발달되어 있지 않아 거리에 물이 흥건했다. 포석 경계가 무너지고 군데 군데 파인 인도에 행인들의 슬리퍼 소리가 탁탁 들렸다. 앞집의 음악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담장 너머로 방송 소리가 들려왔다. 디제이의 목소리 같았다. 큰 스피커와 광고판을 승용차 위에 실었다. 포르투갈어라 알아듣지 못했지만, 망가, … 오렌지 과일이름과 케지오(치즈)라는 아는 단어가 들렸다. 


“저게 무슨 방송이야?” 남편에게 물었다. 

“슈퍼마켓 광고 차야.” 한국은 저런 게 없어진 지 얼마나 오래됐다고. 그런데 그때부터 과거 여행이 시작됐다. 우리 시골 동네에도 여름이면, 꼭 뭘 팔러 오는 장사 트럭이 있었다. 그 트럭에서 나오는 방송은 브라질처럼 전투적이기보다는 리듬을 오르락내리락하는 타령 같았다.


“상 사이오. 원주에서 만든 좋은 상 사이오.”했고,  

어떤 날은 “참외가 왔습니다.  꿀 같은 참외 사세요.” 

어떤 날은 “제기, 제기가 왔어요.”했다.   


시장통에서 골라 골라잡아 하는 옷 장사꾼처럼 계속 반복되는 광고는 봉고트럭 위에 확성기처럼 생긴 스피커에서 나와서 성북 마을로 퍼졌다.  마을 입구에서 우리 집까지는 길이 넓어서 차가 쉽게 들어왔다. 질퍽이는 논길로 내려가기도 좁아서 잘못하면 하천으로 떨어질 수 있는 좁은 뒷동네 길로 트럭은 지나가기 애매했다. 옆집 골목길이나 논길에서 차를 돌려 다시 우리 집을  돌아 나가야 했다. 한참이나 광고가 지속됐다. 


엄마는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떠돌이 장사꾼에게 물건을 산 적이 거의 없었다. 알뜰하게 살았다. 혹시나 우리 동네에 장사꾼이 오고 우리 집을 장소를 제공한 대가로 그릇 장수한테 칼을 선물로 하나 받거나 하면, 미안해서 뭔가 하나사주기는 했어도…. 



2019년 한국에 돌아갔을 때다. 독일에 비해 한국의 겨울은 따뜻했다. 하늘도 맑았다. 매일 그 햇빛과 하늘을 즐겼다. 현관문 앞 달궈진 주황빛 타일 위에 앉아서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읽고 있었다. 왼쪽에는 엄마의 치자나무가 있었고, 그 아래 어디에선가 고양이 울음이 들려왔다. 엄마 집을 본거지로 삼은 도둑고양이가 왕겨 포대기 더미 사이에서 새끼 여덟 마리를 낳았다. 햇빛이 잘 비치는 아침마다 새끼들을 하나씩 물고 현관 앞에 나타났다. 여린 야옹이 울음이 들리는데 나는 햇볕을 쬐면서 아들 둘이 괭이나 나무 꼬챙이로 마당 잔디를 휘갈겨 놓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고물 삽니다. 못 쓰는 자전거, 농기계, 옛날 절구, 쌀 뒤주 … "하고 트럭 장소 소리가 들렸다.  그 물건 중에서 옛날 뒤주가 생각났다. 집에 오래된 쌀 뒤주가 있었지. 아직도 엄마가 거기다 보리를 넣어두고 돈도 숨겨 두는 비밀의 금고. 옛날에는 거기에 쥐가 들어가서 오줌을 쌌느니 더러워 죽겠다느니, 새언니와 엄마, 아버지가 고성을 지르며 토론을 했었다. 이제는 뒤꼍 양지바른 곳에 세워 놓았는데, 언젠가 장식품으로 쓰겠다고 새언니가 버리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던 그것이다. 


우리 집에 트럭이 멈췄다. 장사꾼처럼 보이는 아저씨가 마당에 들어와서, 치자나무 아래의 돌절구를 보더니, 오만 원에 팔라고 했다. "아, 그건 제 것이 아닌데요." 엄마는 어디 계시냐.고 물었다. 엄마는 그 시간에 집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미, 들에 일하러 갔거나 볼 일이 있어서 읍내에 갔다. 엄마가 언제 오시는지 물었지만, 엄마의 스케줄을 내가 알리 없었다. 장사꾼은 아쉬운 듯이 사라졌다. 엄마가 오고 나서 엄마에게 그 말을 전했다. 


“그거, 저번에도 어떤 고물 장수가 와서 달라고 하대. 그게 얼마나 된 줄 알아? 40년이 더 넘었어. 내가 시집와서 여기서 하나 구한 거지. 그런데 안 팔았어. 그런 건 파는 게 아니야.” 

“나라면 그냥 그 돈을 받고 말겠다.” 그렇게 답했다.  


생각해 보면 엄마는 내게 말하지 않은 게 있었다. 그 물건에 담긴 추억을 다 말하지 않은 게 아닐까.  


그 돌절구는 어릴 때부터 수돗가에 있었다. 떡을 찧기를 할만큼 깊지 않았다. 두 손을 활짝 필만큼 넓었고 손을 세우면 딱 그렇게 우묵했다. 그 절구는 절구 구멍보다 그 옆이 널찍해서 펑퍼짐한 아낙네의 엉덩이처럼 수돗가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엄마는 그 절구로 겉절이를 만들 신선한 고추를 찧고 마늘을 찧고 또 어떨 때 깨도 빻았다. 엄마가 거기다 대충, 재료들을 던져 넣듯이 넣고 절굿돌멩이(진짜 돌멩이, 말썽꾸러기 우리가 가지고 놀고 버리고 해서 그 돌멩이만은 자주 교체되었다.)로 힘차게, 그때 엄마는 젊었으니깐 쿵쿵 찧으면 그 매운 고추향, 마늘 향, 고소한 깨소금 향이 마당에 퍼졌다. 



겨울이면 절구에 눈이 녹고 얼었다. 돌멩이 주변에는 살얼음이 얼었다. 살얼음사이에 손가락을 넣어 돌멩이를 꺼냈다. 돌멩이로 내려쳐서 얼음을 캉캉 깼다. 그렇게 해 놓고 나면 속이 시원했다. 봄이 되고 보에 가둬 둔 물을 열고, 동네 수로에 물이 흐를 때,  즉 냉이가 날 철에는 엄마가 겨우내 절구에 고였던 물을 말끔히 걷어냈다. 몇 번씩이나 바가지에 맑은 물을  끼얹고 돌절구를 닦았다. 아마, 그날은 어디서 가져온 도라지를 거기다 찧었다. 


그 돌절구에는 엄마의 모든 기억이 담겨 있다. 돈 오만 원은 세월을 견딘 그 돌절구로서는 터무니없이 쌌다. 백만 원을 줘도 그걸 팔지 않을 것이다.  엄마는 그 추억을 내게 모두 했어야 했지만, 그런 말을 할 줄 모르는 엄마이므로, 내가 대신 그 추억과 이야기를 쓴다. 엄마의 추억의 살림, 돌절구는 치자나무 아래서 겨우 내내 햇빛을 쬐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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