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원 룸 06화

원 룸 5.

by 원더혜숙

입국장에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울렸다. 지수가 발을 옮길 때마다 출입증이 좌우로 흔들리며 톡톡하고 소리 냈다. 보안 검색대를 지나면 화려한 면세점과 여행객으로 즐비했다. 바의 일은 무난했고 지수는 매니저가 아이스크림 매장의 매니저에 비해 자기에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그 점을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바에서 설거지하던 지수는 맞은편 시계 매장을 보았다. 환한 전등 아래 시계와 카메라가 반짝였다. 어두운 바에서 더 밝아 보였다. 매장 남자는 흰 셔츠를 입고 출입증을 목에 걸었다. 아크릴 출입증이 흔들리면 가슴 주머니에 재빠르게 넣고 손님들에게 시계를 보여줬다. 지수는 지하에서 물류를 받아 그 앞을 지날 때마다 남자에게 손을 흔들었다. 어느 날, 기다린 듯이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연락처를 물었다.


“이 년은 은근히 용기 있어.” 동료는 욕을 섞어 지수를 칭찬했다. 지수는 남자와 술을 마셨다. 영마루 공원을 걸었다. 그가 왜 거기서 일을 하고 있는지, 차후 어떤 직장을 잡을 것인지는 들리지 않았다. 남자는 지수의 손을 잡았다. 바람에 지수의 재킷이 날렸다.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리고 칭칭 얼굴을 감고 들었다. 남자의 입술이 지수의 입술이 닿았다. 지수는 부드럽지만 거친, 그의 입술을 물고 혀를 받았다. 끈적한 달팽이 같은 혀가 지수를 삼킬 듯이 덤벼들었다. 지수는 미영과의 키스와 상상했다. 꿈에서는 마시멜로처럼 부드럽고 달콤했다.


지수는 남자를 따라 그의 오피스텔에 갔다. 남자의 흐트러진 침대, 눌리고 땀에 찌든 베개 위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았다. 돌아갈까 생각했지만, 남자는 지수 속으로 급히 들어왔다. 남자 밑에 깔린 채 지수는 자신을 형용하는 단어들을 떠올렸다. 연출, 거짓말, 허위… 지수는 남자의 어깻쭉지에 묻은 땀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다른 인간의 체온에 닿은 평온함은 딱 몇 초, 지속됐다. 지수의 세상은 그만큼 밝아진 것일까. 지수는 ‘뭔가 잘못됐어.’라는 속말이 자꾸 꾸역대는 것 같았다.


남자와의 일은 지수에게 빈 공항에 울리는 하이힐 소리와 흩어졌다. 지수는 남자의 손인사를 못 본 체했다. 무미건조한 기억이 남자 얼굴을 보면 떠오를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고, 그의 가슴팍에서 달랑거리는 출입증이 지수에게 최면 걸었다. ‘그런 일은 없었던 거다. 없었던 거야.’ 지수는 그 사실을 부정했다. “지수야, 시계 남자랑은 잘 돼 가?” 미영이 물었다. 지수는 자신도 남자와 연애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되어 기뻤다. 가짜 연출인 걸 알지만 과시하듯 “한번 잤어.”하고 내뱉었다. 미영은 입을 딱 벌렸다. “얘는, 연애하는 걸 격하게도 말하네.” 미영은 지수의 과감한 말에 질려버렸는지 말이 없었다. 지수는 미영과 지영이가 그랬던 것처럼 즐겁게 대화할 것을 기대했지만 실망했다.

keyword
이전 05화원룸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