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序文): 글의 내용이나 목적 따위를 적은 글. 서시(序詩)는 시의 내용이나 목적 따위를 적은 시. 시인이 시를 선보이기 앞서 시에 대해 하고 싶은 말쯤으로 이해하자. 때로는 시집의 내용이 자주는 시를 대하는 시인의 자세가 드러난다.
시는 삶이다! 즉 서시로 시인의 삶의 태도도 엿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윤동주 시인의 서시가 그러하다. 그 외에도 서시란 제목으로 많은 시들이 있다. 다음에 서시를 읽으면, 그런 서시의 의미를 생각하며 읽어보는 건 어떨까.
여기서는 윤동주 시인의 <서시>, 이성복 시인의 <서시>, 고정희 시인의 <서시>의 예를 든다.
(아래 링크는 윤동주의 서시의 리뷰가 있다) https://m.blog.naver.com/jua423/222992521633
화자는 부끄럽다. 푸른 하늘이 그를 매일 내려다보기에.
화자는 괴롭다. 잎새에 바람이 일지 않는 날이 없으므로.
그래도, 별을 노래하는 마음이다. 별은 나아갈 방향이다. 희망이다. 또 화자 자신이기도 하다.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결심은, 죽어가는 것들, 즉 내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은 이 세상을 사랑하려는 다짐이다. 그 속에 자신의 길을 간다는 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소신이다.
그런데도 빛나고 굳건해야 할 하늘의 별마저, 바람에 스쳐운다.
이 시를 자신의 길을 걷겠다는 시인의 굳은 결심으로 볼 것인지 마지막 구절의 현실에 대한 암담함으로 울고 있는 별처럼 스러지는 나의 희망을 근거로 쓸쓸하게 볼 것인지 생각해 보자. 둘 다로 보면 어떨까. 결심을 했어도 현실은 팍팍하고, 스치는 날들이 우리의 아침과 저녁을 매일 맞는다. 그런 매일을 맞은 우리가 별이 되어, 흔들리더라도 자신의 길을 가는 건 어떨까.
청렴한 청년 윤동주의 시는, 그릇을 깼다거나 동생을 돌보지 않고 친구들과 놀러 나간 누나, 리사가 자기 전의 자신의 작은 죄를 고백하고, 반성하는 기도문 같다.
서시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었습니다
늦고 헐한 저녁이 옵니다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사방에서 새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
어두워가며 몸 뒤트는 풀밭,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
키 큰 미루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
이성복, 서시 <남해금산>
시맥을 읽기 전에 시어에 빠져든다. 문맥을 한쪽으로 밀어 두고 이 단어들을 보자.
늦고, 헐한 저녁,
어두워가며 몸 뒤트는 풀밭,
바빠서 끼니를 제때 챙기지 못해 저녁이 밀리고 밀려 늦어졌다. 그 저녁이 풍성하고 제대로 되면 좋겠지만 헐다. 부족하다. 엉성하다, 찬이 모자란 그런 식상한 말을 전부 ‘헐하다’라는 형용사에 담았다. 그리고 이 둘을 합친 ‘늦고 헐한 저녁’을 먹는 주인공의 초라하고 쓸쓸한 저녁을 생각해 보라. 겨우 세 단어로 독자라는 소(牛)를 그런 심상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투우사가 시인이다.
어두워간다. 신나게 놀고 있는데 어두워지는 날은 야속하다. 해 놓은 일은 별로 없는데 시간은 가고 일을 파해야 하는 저녁이 찾아오면 초조하다. 그래서 몸이 뒤틀린다. 마치 풀밭에서 혼자 풀을 먹고 있던 양이 어두워지자 다른 양들이 사라진 것을 보고 몸을 뒤틀며 우는 것 같다. 동시에 풀밭을 여러 번 되뇌어 보면, 풀밭은 다름 아닌 마음이다. 그런 초조하고 야속한 마음으로 애탄다.
그렇게 두고,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를 읽자.
나를 알아보는 당신은, 문득이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맞은편에 서 있다면, 문득이 아니라 단번에 그를 알아보지 않을까. 연인이 아니라, 당신을 자신으로 보면 어떨까. 내 양심, 내가 원하는 모습의 나. 우리는 우리 자신도 잊어버리고, 문득 맞은편에 나와 비슷하게 고민하는 얼굴을 보면 나와 동일시할 수 있으니깐.
혹은 자신이 아니라, 시에 대한 완성도로 보면 어떨까. 이상적인 삶. 그런 이루고 싶은 것들이, 어느 순간, 문득 이루어지길 바라는. 그럴 때까지 정처 없이 떠도는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알아봐 주길 바라고 크게 부르지만, 작은 미루나무 나무 소리에 묻히고 마는 것이다. 즉, 내 바람은 내쳐지고, 노년은 가깝다. 다시 한번 늦고 헐한 저녁, 어두워지며 몸 뒤트는 풀밭으로 돌아간다. 아, 화자의 마음은 딱 여기에 머물러있다.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처럼.
서시
제 삶의 무게 지고 산을 오르다
더는 오를 수 없는 봉우리에 주저앉아
철철 샘솟는 땀을 씻으면, 거기
내 삶의 무게 받아
능선에 푸르게 걸어주네, 산
이승의 서러움 지고 산을 오르다
열두 봉이 솟아 있는 서러움에 기대어
제 키만 한 서러움 벗으면, 거기
내 서러운 짐 받아
열두 계곡 맑은 물로 흩어주네, 산산
쓸쓸한 나날들 지고 산을 오르다
산꽃 들꽃 어지러운 능선과 마주쳐
제 생애만큼 쓸쓸함 묻으면, 거기
내 쓸쓸한 짐 받아
부드럽고 융융한 품 만들어주네, 산산산
저 역사의 물레에 혁명의 길을 잣듯
사람은 손잡아 서로 사랑의 길을 잣는 것일까
다시 넘어가야 할 산길에 서서
뼛속까지 사무치는 그대 생각에 울면, 거기
내 사랑의 눈물 받아
눈부신 철쭉 꽃밭 열어주네, 산, 산, 산
고정희, <아름다운 사람 하나>
여기서는 산을 주목하자. 한 번이었던 산이, 산산, 산산산, 산, 산, 산으로 늘어간다. 마치 첩첩산중을 마지막에 목도하는 것 같다. 엄마가 잔칫집에서 돌아오는 길목에서 떡을 달라고 하는 호랑이는, 한 번에 떡을 다 먹지 않고 고개를 하나를 넘고, 그다음 고개를 넘고 그리고 마지막 떡을 다 먹을 때까지 산을 넘는다. 엄마의 집으로 가는 고갯길에도 이렇게 호랑이와 산이 기다리고 있고, 결국의 죽음의 길일 진대, 그것이 우리 삶이 아닌가.
1연의 삶의 무게는 푸름으로 해소되고, 2연의 서러운 짐은 맑은 물로 씻고, 3연의 쓸쓸한 짐은 누군가의 융융한 품으로 데운다. 그러나 아직 호랑이가 기다리는 고개가 남았다. 나의 사랑하는 이는 어디 있는고? 호랑이에게 줄 떡이 없단 말이다. 울고 싶어서 펑펑 울고, 그 눈물이 마침내 주변의 꽃들을 살리며, 나는 점점이 흩어지는 이름처럼 물결치는 산세의 메아리로 사라진다.
첩첩산중의 고갯길, 험한 길로 보이는 산은 때맞춰 선물을 준다. 푸르름, 맑은 물, 융융한 품까지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나온 것인고 하면, 또 산이다. 고개를 넘는 동안, 힘들기는 하여도, 사실은 그 와중에도 쉼이 있고 위로가 있고, 사랑이 있다는 것의 다른 말이 산이다.
1연의 시시포스가 바위를 산까지 오르는 그 모습이 이미, 산이 곧 인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산이 때로는 기쁨이 되기도 하고, 힘들게도 하니. 과연 그렇지 않은가. 고정희 시인의 인생관, 혹은 詩에 대한 자세가 아닐까. (사설을 덧 그리자면, 고정희 시인은 등산이 취미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