를 원래 차리려고 했던 게 아니다
우연이 반복되어 필연이라고 믿는 일이 있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토마스는 테레자를 그렇게 몇 번의 우연으로 결국엔 좀처럼 깨지 않는 자신만의 사랑의 룰을 깨고 그녀에게 손을 잡히고 함께 죽어가지 않던가.
글을 잘 쓰고 싶었다. 그 때는 산문을 위주로 썼고, 딱 그때 어디선가 산문을 쓰더라도 운문, 즉 시를 읽어야 한다. 라는 정언 명령같은 걸 읽었다. 나란 사람은 활자로 된 것이라면 곧이곧대로 믿는다. 그때부터 블로그에서 아침마다 시동냥을 했다. 시를 포스팅하는 블로그 이웃들을 정해 두고 매일 거기 가서 시를 한편 씩을 낭독하고 읽어도 보았다. 그 더딘 발걸음이 깊어졌다. 필사를 하고 시집을 구매하고 시집 리뷰를 하고, 급기야 시를 쓰기 시작했다.
이제는 감히 시안(詩眼)이 생긴 것 같다. 시를 읽고 나름으로 설명한다. 이제는 감히 시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랑하다.는 동사고 동사는 능동적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시를 쓰기 위한 나의 시 읽기는 토대다. 좀 이기적이다.
산문을 쓰려고 시작한 본심이 시를 쓰고, 좀 더 잘 쓰고 싶다거나 좋은 시를 쓰고 싶다는 욕구로의 발전까지, 우연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하다.
이 시숙소는 지금껏 읽어온 시들을 모아놓은 곳이다.
시숙소는
시가 익어가는 곳,
시를 익히는
요리하는 곳이기도 하다.
어쩌면, 나에게 치우친
사적인 읽기 일지도 모른다.
귀감까지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이렇게 시를 읽는 사람도 있고
이렇게 시를 사랑하고 시 짓는 사람도
있다는 보기를 주려고 시숙소를 연재한다.
작고 원대하게는 나의 이기적 창작 본능이
타인의 독서와 창작 본능에 닿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