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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바삭 Oct 30. 2022

어느 화이트데이의 추억

살벌한 과자 파티 

본가에서 독립해 첫 자취 생활은 학교 기숙사에서 시작했다. 방에는 룸메이트 언니와 함께 쓰는 2층 침대가 한쪽 벽에 있었고, 반대편에는 책상과 옷장이 나란히 있었다. 기숙사에서 내 방과 바깥을 구분하는 건 달랑 방문 하나였다. 얇은 방문이지만 사실상 대문 같은 역할이었기 때문에, 저녁에 공용 화장실에서 씻는 것도 마치고 방으로 귀가하면, 반드시 방문을 잠갔다. 방문 사이로는 밤새 켜져 있는 복도의 불빛이 새어 들어왔고, 뒤늦게 귀가하는 이들의 발소리도 들려왔다. 쪼그리고 앉아 볼일을 보는 변기에 바닥 난방이 되지 않는 시멘트  바닥도 불만이었으나, 가장 큰 불만은 역시나 먹기였다.


본가에서는 나를 깨우는 알람은 소리가 아니라 냄새였다. 아래층 부엌에서 탄수화물, 단백질이 뜨거운 기름을 만났을 때 풍기는 치명적인 앙상블 ‘냄새’가 위층  내 방문을 두드렸다. 밤새 이 냄새만을 기다렸던 콧속 후각세포는 황급히 나를 깨웠고, 나는 아무 저항 없이 그들이 이끄는 대로 밥상에 앉았다. 숟가락질 몇 번에 점점 위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안 떠지던 눈도 그제야 커졌다. 그런데 기숙사에서 이런 맛있는 하루의 시작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꾼다. 몇몇 용자들은 매우 원시적인 상태로 식당에 오기도 하였으나, 나는 드라마에서처럼 운명의 짝과 갑자기 마주칠 수도 있다는 환상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언제나 준비된 여인이어야 했다. 옷을 갈아입고 세수라도 하고 나갈라치면 먹을 흥이 쏙 떨어졌다. 또한 정해진 시간에만 밥이 제공되니, 가뜩이나 아침잠이 없고 눈을 뜨기도 전에 밥부터 먹어야 하는 나에게 이보다 가혹한 환경은 없었다. 


식당에서 밥을 먹는다고 해도 웬만해서는 포만감이 들지 않았다. 조그만 접시에 더 조 금하게 담긴 주요 반찬들은 더 달라고 해도 그만큼만 주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양 젓가락을 한껏 벌려 집었던 나물은 몇 가닥으로, 수북하게 쌓아서 종류별로 두껍게 싸 먹었던 쌈채소는 서너 장으로, 몇 알씩 해치우던 과일들은 몇 조각으로 제공되었다. 먹기는 먹어야겠고, 양껏 먹을 건 없고, 그래서 찾은 해결책이 과자였다. 원래 과자를 좋아하긴 했지만, 식신 종갓집 출신인 나에게 과자는 절대 주식이 될 수 없었다. 무릇 잘 쌓아놓은 밥과 반찬, 과일 위에 과자가 더해질 수 있지, 과자로 한 끼니를 채울 수는 없었다.  


허전한 위에 들어간 초코파이는 결코 한 개로 끝나지 않았다. 과자가 무서운 점은 결코 한입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다소 포만감이 있는 파이류를 먹으면, 마치 밥을 먹은 양 반찬류를 찾게 되는데, 그게 짭짤한 봉 지 과자였다. 바다에 사는 새우, 꽃게, 갈치류를 먹고 나면, 입속 염도가 너무 높아지고 비린내가 거슬리면서 이를 중화시킬 크래커가 당긴다. 먹다 보면 목이 콱콱 막힐 정도로, ‘니맛내맛’도 아닌 크래커들을 먹으면 또 너무 심심해진다. 상큼하고 촉촉한 과일류가 생각나는 시점이다. 이때 실제 과일은 전혀 들어가지  않은 강렬한 과일 향의 젤리나 사탕을 먹는다. 이 정도 먹었으면 배가 불러야 하는데, 과자는 정말 놀랍게도 배가 부르지 않다. 그야말로 뫼비우스 띠와 같은 과자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던 중 과자로부터 단단히 혼쭐이 나는 사건을 겪게 된다. 어느 화이트데이, 미스 유니버시티였던 룸메이트 언니는 아침부터 일찌감치 데이트를 나섰다. 기념일을 함께할 짝꿍이 없었던 나는 혼자서도 이 기념일을 즐겁게 보내겠다는 계획을 품고, 과자 쇼핑에 나섰다. 내가 가진 가방 중에 제일 큰 가방을 메고, 기숙사를 벗어나 근 처 슈퍼를 배회하면서 각 슈퍼에서 가장 주력으로 팔고 있는 과자를 하나씩만 샀다. 한 곳에서 다 사버리기에는 부끄러웠다. 누구도 신경 쓰지 않겠지만 이  과자 파티는 은밀해야 더 맛있었다. 


기숙사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는 아이스크림을 사는 것을 마지막으로 쇼핑을 마쳤다. 마침 학교는 산에 있어서 기숙사로 가 는 마을버스에는 등산객들이 아침에 많이 탔는데, 나도 그들 틈에서 마치 등산을 가는 것처럼 불룩해진 과자 등산 가방을 메고 본진으로 향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던 예능 프로그램을 틀어놓고 신나게 먹어대기 시작했다. 빈 봉지가 꽤 쌓이고, 평소 먹던 양을 한참 넘겨서 앞으로 얼마나 더 먹을 수 있을까 싶을 즈음 난데없이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과자들이 뾰족한 산으로 변해서  나를 공격하는 것 같았다. 딱딱한 돌이 되어서 굴러다니는 것 같기도 했다. 어떻게든 통증을 이겨내려고 몸을 웅크리고 기숙사 바닥에서 떼구루루 구르기를 수십여 분.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을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나니 어느새 저녁이었다. 


룸메이트 언니는 내가 봤던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늦은 밤 남자 친구와 데이트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선물로 받은 작고 반짝이는 목걸이인지, 귀걸이인지를 내게  자랑했다. 받긴 했는데 그렇게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며, 나에게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냈냐고 물었다. 나는 과자를 산더미처럼 먹었는데 그 과자가 나를 공격했다고, 언니가 받은 그 선물과 비슷하게 생긴 게 내 몸속에 있는 것  같았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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