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M님 사연] 재수 시절 돌봐주신 혜성스님

사연 제공 : BMK 님

by 김작카

가족과 함께 차를 타고 가던 중 방향감각을 잠시 잃고 운전대를 그쪽으로 돌린 건 운명이었을까? 잘못 들어간 길임을 알면서도 나의 발은 나도 모르게 액셀을 밟았으니 말이다. 그렇게 가다 보니 천은사라는 이정표가 보였다. 오랜만이었다. 기억의 오선지에 도돌이표를 올려보니 불현듯 떠오르는 그분의 음성과 풍경이 있었다. 내가 재수 시절 두 달, 대학에 합격한 후 세 달을 머물던 천은사, 그리고 그곳의 주지스님 혜성스님과의 사연이다.


아무도 믿지 않지만 예전의 나는 몹시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사람 많은 재수학원은 적성에 맞지 않았다. 때마침 친구가 조용한 절에 같이 가서 공부하자고 꼬드겼다. 속으로 ‘아싸!’를 외쳤다. 사실 공부 목적보다는 집에서 떨어져 친구와 같이 지낸다는 점이 좋았다. 그렇게 찾아낸 원주 천은사... 처음 도착하여 내렸을 때 무뚝뚝한 표정의 혜성스님께서 맞아주셨다.

원주 천은사 전경 (출처 : doopedia.co.kr)

겉으론 그렇게 보이지만 몇 마디 나눠보니 온화한 구석이 많은 스님임을 알 수 있었다. 친구의 어려운 집안 사정을 알고 친구의 숙식비를 절반만 받기로 한 것이다. 반값인 대신 절 청소를 하라거나 스님들 수발을 들라는 조건 또한 없었다. 나도 살짝 할인을 기대했지만 없었다.


어쨌든 공부 외엔 딱히 할 게 없는 환경과 스님의 배려 때문인지 나도 친구도 대학에 붙었다. 특히 내가 붙은 대학은 스님이 다른 대학에 비해 합격하기 쉬운 곳이니 지원해보라며 넌지시 알려준 곳이다. 절에서 버스정류장까지 걸어서 20분, 버스 타고 30분은 가야 하는 학교지만, 나는 이미 이 절에서 통학을 하고 싶다는 마음을 굳혔고, 스님 또한 흔쾌히 허락해주셨다. 재수 시절 나에 대해 할인을 못해준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면서 숙박비의 반만 받는 혜택을 누리면서.


수업이 없는 토요일 어느 날, 절에서 수행하는 행자와 시내 구경을 다녀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것이 큰 사건으로 이어질지는 꿈도 못 꿨다. 행자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절이 답답하고 짜증난다는 얘길 들었다. 그것도 수행을 하는 행자와 술을 마시면서 말이다. 나는 그를 잘 달래 절에 돌아가지 않고 그 길로 함께 더 술을 마셨고 여행을 떠났다. 다음날 혼자 절로 돌아가기 좀 그래서 같이 가자고 설득했지만 행자는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났다.


절에 돌아가서 구구절절 이어진 나의 변명은 스님에게 씨도 먹히지 않았다. 때마침 혜성스님을 만나러 절에 와있던 다른 스님에게 엉덩이 매를 맞기만 했다. 그걸로 업보(?)를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몇 달 후 또 다른 잘못을 저질렀고 참다못한 스님이 던진 이쑤시개 통에 엉덩이를 찔리기도 했다. 내 엉덩이는 절에서 단련되었다.


여름방학 이후부터는 절을 떠나 학교 근처에서 하숙을 하면서 인연이 멀어지나 했다. 아니었다. 그때 그 행자가 다행히도 속세의 방황을 마치고 절로 돌아갔고 내가 군 복무 중일 때 스님이 함께 면회를 오기까지 했다. 면회를 마치고 돌아갈 땐 몇 권의 인문학 서적 속에 용돈을 챙겨 넣어주기도 하셨다.


그런 기억을 아내에게 이야기하며 가다 보니 차는 절에 이르렀다. 스님이 기력이 없을 때 드시고 회복하셨던 음식들 사드시라고 용돈 넉넉히 드리고 그때 참 고마웠다는 인사를 꼭 드릴 생각으로 차에서 내렸다. 엄하기도 했지만 너는 꼭 잘 될 거라고 늘 용기를 불어넣어주셨던 그 고마운 기억까지 모조리 털어놓으리라 생각했다. 스님의 말씀대로 나 이렇게 잘 지내고 있다고 자랑하고 싶었다.


마당을 가로질러 가던 중 연세가 지긋해 보이는 스님 한 분을 만났다. 혹시 예전에 계셨던 혜성스님 계시냐고 여쭤보았다. 병으로 세상을 뜨셨다고 했다.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을 뻔했다. 고맙다는 인사 한 번 제대로 드리지 못하고 절을 떠나온 게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스님이 나를 부르셨구나 생각이 드니 이번만큼은 쉽게 절을 떠날 수 없었다.

-BMK-


고마워요 내 마음속에

그토록 오랫동안 살아와줘서

지쳐가던 시간에 그대를 생각하면서

내가 일어설 수 있게 해 준 그대..

-부활 <사랑> 중에서-


* 여성은 아니지만 본인의 요청으로 이니셜 처리해드렸습니다. :)

-김작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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