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님 사연] 이삿날의 선물

사연 제공 : SYP님

by 김작카

이삿날의 선물

지금쯤 짐을 다 실었겠지.. 날이 많이 더운 날이다. 그래도 비가 내리는 것보다는 이사하기엔 좋은 날이지. 오래된 살림 냄새들도 바짝 말려줘서 좋을 것이다. 뭐 필요한 건 없을까?... 에휴.. 내가 뭐 가봐야 괜히 거추장스럽기만 할 테지. 가까운 곳에 사는 친한 친구가 이사하는 날, 아침부터 나는 마치 내가 이사 가기라도 하는 듯이 마음이 분주했다. 내 중얼거리는 말을 들었는지, 남편이 웃으며 말했다.

“김밥이라도 사가지고 가”


남편의 말에 연락을 안 한 지 한참 된 영훈이 엄마가 떠올랐다. 오후 내내 연락을 망설이다 어떻게 보내느냐고 안부 카톡을 한 줄 보냈더니, 바로 전화가 왔다. 어김없이 반가운 목소리였다.


3년 전, 우리 가족은 여주에 살고 있었다. 우리 딸과 같은 반인 영훈이는 초등학교 5학년 나이답지 않게 생각이 깊고 어른스러운 아이였다. 그 아이의 엄마는 나와 종교도 같고, 조용한 성격이어서 잘 통했고 금세 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녀와 진즉에 알았다면 좋았을 것을, 경기도의 동쪽 끝인 여주에서 서쪽에 있는 군포로 이사 갈 계획을 잡아놓은 때 친해진 것이 아쉬웠다.

여주에서 군포로 이사를 하는 날이 되었다. 아침 일찍 영훈이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집앞에 왔는데 잠깐 볼 수 있냐는 것이다. 마침 이삿짐센터에서 막 도착하고 이것저것 설명하느라 결국엔 만나지 못했고, 쓰레기를 버리느라 밖에 들락날락하던 남편이 대신 영훈이 엄마를 만나서 인사를 주고받았다. 남편은 영훈이 엄마가 무슨 봉지를 줬다는 말을 했지만, 나는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건성으로 듣고 말았다.


이사는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했었다. 집주인 할머니와 통화를 하기 전까지는. 집주인 할머니는 서울에 사셨는데 잔금을 계산하러 여주로 오시는 중이었다. 우리는 이 집에 들어오면서 얼마간의 대출을 하였는데, 새로 이사 가는 집에서도 정확히 같은 금액의 대출이 필요했다. 같은 은행이고 액수도 같고 해서 새로 대출을 받을 필요 없이 그대로 새로운 집을 대상으로 대출을 승계하기로 은행과 이야기가 다 된 상태였다.

주인할머니와는 사실 아무런 상관이 없는 상황이었고, 그저 확인하는 절차로 사인만 하면 되었는데, 이 할머니가 갑자기 대출한 돈을 먼저 은행에 갚고 새로 대출을 받으라고 고집을 피우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부동산 사장님도 나서서 할머니와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니 걱정 마시라고 설득을 해도 요지부동이었다. 남편은 왜 남의 빌린 돈을 갚아라 말아라 하냐며 분통을 터뜨렸고, 처리 안 해주면 오늘 집 못 비우겠다 하며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이미 우리 짐을 실은 트럭은 군포를 향해 떠났는데, 이사를 못가면 어떡하나 하는 오만가지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할머니를 모시고 국민은행 여주지점을 찾아가 담당자와 한참을 이야기했지만, 할머니는 이해를 하시는 건지 못하시는 건지 계속 안 된다 소리만 하셨다. 그때 나이 지긋한 분이 오셔서,

“할머니, 제가 여기 부지점장입니다. 그리고 여기 모든 은행직원들이 다 보고 있어요. 절대로 사기 아닙니다. 걱정 마세요”

라고 말하자 마침내 할머니는 마음이 놓이셨는지 서류에 사인을 해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모든 절차를 마치고 우리 네 가족은 차에 몸을 싣고 여주에서 100Km 정도 떨어진 군포로 출발할 수 있게 되었다. 영동고속도로에 오를 때 여주 톨게이트를 지나며, ‘어휴, 이 지긋지긋한 동네, 마지막으로 정 떼고 떠나는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모든 일에 홀가분해지자 배에서 꼬로록 소리가 들렸고,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것이 생각났다. 하지만 군포에서 짐을 내리기 전까지는 도착해야하기 때문에 어디 식당에 들르기에는 촉박했다. 게다가 좀전까지 실랑이를 했더니 휴게소 음식 먹으면 체할 것 만 같았다. 그때 남편이 “그 김밥 있잖아. 그거” 라며 엄지손가락으로 뒤를 가리켰다.

아! 영훈이 엄마가 전해준 비닐봉지에 들어있던 것은 김밥이었다. 우리는 받자마자 바로 차에 실어놓았던 김밥을 꺼내 한 사람 앞에 한 줄씩 손에 들고 먹기 시작했다. 이 얼마나 깊은 배려인가! 그녀는 마치 우리 가족에게 오늘 일어날 일을 예견이라도 한 듯 가장 필요한 것을 아침부터 들고 와준 것이다.

꿀맛같은 그 김밥을 하나하나 떼어먹으며, 지나온 삶터에서의 추억들이 그래도 좋았구나.. 좋은 사람들을 남겼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영훈이 엄마에게 감사한 마음이 든다. 이사하면 보통 짜장면이 떠오른다고 하지만, 나는 그 김밥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SYP-


이사를 가도 그곳에 두고 오는 아름다운 짐이 있군요. 그리움입니다.

-김작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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