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터미널역에 내려 밖으로 나오니 소나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마중을 나올 사람도 없고 비는 그칠 기미도 없는데 지하상가에서 장까지 보아온 터라 손에 든 짐도 기분도 꽤 무거웠다. 그런 난감한 와중에 아들뻘 되어 보이는 젊은이 한 명이 내 앞을 머뭇거렸다. “우산 없으신가 봐요. 혹시 이 근처 사시면 같이 바래다 드릴까요?” 그는 언제 준비했는지 우산을 쓰고 있었다. 다들 지하철 역사 나오는 곳 처마 밑에서 소나기가 잦아들기를 바라보는 상황인데...
모르는 사람이 베푸는 친절은 경계하는 게 오랜 인생의 경험이라, 괜찮다며 부드럽게 거절했다. 나의 거절이 머쓱했는지 발길을 돌리려는 젊은이의 볼에 약간의 붉은 기운이 맴돌았다.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긴 젊은이의 눈빛이나 말투까지 종합해보니 나쁜 짓 할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그 또한 100% 믿을 수 없지만. 나는 돌아서는 젊은이를 불러 세우고, 결국 젊은이와 같이 집까지 가기로 했다.
집까지 바래다주는 것으로도 미안한데, 젊은이는 한 손에는 우산을, 한손에는 내 짐 중 제일 무거운 걸 들고 이동하는 고생을 했다. 그런 젊은이에게 믿음이 가면서도, 전혀 모르는 그에 대한 불안이 공존했던 건 사실이었다. 젊은이가 이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저희 어머니에게 너무 못해드렸어요.” 젊은이의 말은 연기가 아니었다. 깊은 슬픔과 반성이 말에 절여져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럼에도 골목에 들어섰을 때 다시 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낮에도 사람이 많지 않은 동네라서. 이제 가도 된다는 말을 들은 체 만 체 젊은이는 끝까지 따라왔다. 결국 집 앞에까지 이르렀다. 이제 집이니 돌아가도 된다고 하니 젊은이는 짐이 비에 젖지 않도록 빌라 안쪽에 들여다 놓는 걸로 고된 여정을 마쳤다. 고맙다는 말로 인사를 건네는 나에게 젊은이가 말했다. “어머님...다음엔 모르는 사람이 이유 없이 도와준다 하면 절대 믿지 마세요. 따라가지도 마세요. 저를 만나신 거니까 괜찮은 거에요. 전 정말로 도와드리고 싶었거든요” 배시시 웃으면서 돌아서는 그의 앞에 소나기도 어느덧 진정되고 있었다. 공무원 시험을 치르고 가던 길이라는 그에게 정말 햇살 같이 환한 소식이 도착했길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