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인내심은 문화의 장벽을 뚫기엔 역부족이었다.
우리는 다른 세상에서 자라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른 게 당연했다. 그런데 나는 언어의 복잡함을 너무 가볍게 여겼다 — 사랑이면 다 될 줄 알았다. 사랑 때문에 우리가 무너질 줄은 몰랐다.
문득, 교수님의 말이 떠올랐다.
“언어는 교과서로는 이해할 수 없단다.”
그 말은 냉정했지만, 진실이었다. 영어가 직설적인 이유를 묻는 학생들에게 교수는 늘 망설였다. 영어권 사람들도 언어를 체계적으로 배운 이가 아니라면, 대답을 망설였다.
나도 한국어를 배우며 같은 벽에 부딪혔다. 자연스러움은 교재가 아닌 삶에서 나온다. 오빠도 그랬을 것이다. 한국에서 자라며, 언어보다 삶 속에서 말을 배웠을 테니까.
어쩐지, 한국말로 대화할 때마다 오빠는 답답하다고 했다.
내게 설명하지 못해 더 속상하다고도 했다. 언어의 막힘이 곧 감정의 막힘이 되는 순간이었다.
언어가 주인공이라면, 주어와 동사, 형용사, 목적어는 모두 들러리일 뿐이다. 아무리 화려하게 꾸며도, 중심이 없으면 문장은 생명을 얻지 못한다. 나는 언어를 흉내 냈을 뿐이고, 오빠는 그 말이 가슴속까지 닿지 않아 답답했을 것이다.
언어를 지탱하는 사고방식과 문화적 배경이 달랐기에, 우리는 물과 기름 같았다.
사랑은 칼로 물을 베는 일보다 더 고단했다. 우리는 서로의 차이를 베려다, 오히려 금이 갔다.
차가워진 공기 속에서 기름은 얼어붙었고, 사랑은 깨질 듯 버텼다.
지금 돌아보면, 참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한국에서 자란 오빠는 침묵으로 배려를 표현했다.
나는 정반대였다.
내게 배려는, 내가 어떤 상황에 있는지 말하고 어떤 감정인지 표현하는 것이었다. 침묵은 그에게 온전한 배려였지만, 나에게는 감정의 단절이었다. 나에게 배려란 상대의 감정을 함부로 추측하지 않는 것이다.
신이 아닌데, 내가 어떻게 타인의 속마음을 전부 알 수 있을까?
나는 타인의 마음을 가늠하거나 판단하는 것을 무례한 일이라 믿었다. 그래서 ‘그렇다’ 단정하기보다, 내 눈에 보이는 사실만을 말했다. 예를 들어, 상대가 기분 좋은 듯 새 옷을 입고 왔다면 “멋진 옷 입고 왔네. 오늘 무슨 날이야?” 하고 물었다.
보통은 ‘월급 탔나 보다’, ‘승진했나 보다’, ‘애인 생겼나 보다’ 같은 추측이 먼저 따라오겠지만, 나는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밀어냈다.
‘그건 그 사람의 사정이지, 내 일이 아니니까 판단하지 말자’ 하며. 그렇게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 곧 존중의 시작이었다.
연애 초기에 오빠는 내 장점 두 가지를 유독 좋아했다. 반응을 잘한다는 점, 그리고 상대의 의사를 존중한다는 점. 내가 호응하면 그는 늘 기분이 좋았다.
내가 좋고 싫음을 명확히 말하니, 데이트 코스를 짜기도 수월했다고 했다. 함께 놀러 갈 때마다 나는 행복했다. 하지만 그 따뜻한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내 장점이 단점으로 바뀌는 전환점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데이트 중 배가 고파 식당을 찾고 있었는데, 오빠가 물었다.
“저녁 뭐 먹을까?”
“음, 난 초밥 먹고 싶어. 제육볶음 정식도 좋아.”
나는 떠오르는 대로 말했다. 그런데 곧 또 다른 질문이 돌아왔다.
“네가 원하는 걸로 먹자. 어디 갈까?”
초밥과 제육볶음 중 하나를 고르라는 뜻인 줄 알고 대답했다.
“초밥 먹자.”
잠시 뜸을 들이던 오빠가 말했다.
“난 초밥 잘 못 먹어. 다른 건 없어?”
오빠는 정말 회를 잘 못 먹는 사람이었다.
음식으로 다툴 일은 없다고 생각했기에 당황스러웠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빠는 뭐 먹고 싶은데? 우리가 서로 다른 메뉴를 떠올린 것 같은데, 겹치는 게 있는지 맞춰보자.”
단순한 메뉴 하나 고르는 일인데,
서로가 상대를 먼저 생각하다가 오히려 말이 꼬였다.
오빠는 잠시 고민하다 치킨을 먹고 싶다고 했다.
우리가 가던 식당엔 메뉴가 다양해 늘 누군가의 취향이 걸렸기에, 그가 참아왔다는 사실을 나는 미처 몰랐다. 게다가 그는 내가 오늘 치킨 생각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우리는 이미 배가 고팠다. 그리고 누군가가 포기해야 할 타이밍이었다. 메뉴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자, 내가 먼저 말했다.
“치킨 먹으러 가자.”
서로 타협이라기보다, 내가 한 발 물러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다툼이 시작됐다.
오빠는 자기도 치킨이 먹고 싶지만, 나도 즐겁게 먹길 바란다고 했다.
나는 며칠 전 가족과 함께 치킨을 먹어서, 그 생각이 전혀 나지 않았다.
“돈가스?”
“그건 별로.”
“치킨?”
“그건 좀 미안하잖아.”
“치킨 초밥?”
“그런 게 어딨 어?”
나는 분위기를 풀고 싶어 장난쳤지만, 오히려 불을 지폈다.
미국엔 스팸초밥(무스비)도 있고 돈가스 초밥도 있는데, 괜히 억울했다.
나도 참 타협을 몰랐다. 배가 너무 고파서 다른 메뉴를 떠올릴 여유가 없었다.
정신줄을 붙잡고 또박또박 말했다.
“이대로 싸워봤자 결론 안 나. 벌써 저녁 7시야. 싸울 시간에 일단 밥부터 먹고, 배 채운 다음 이야기하자. 지금 공복이라 우리 둘 다 이성적이지 않아. 내 생각은 나중에 하고, 지금은 치킨 먹을까?”
말을 마친 순간, 공기가 묘하게 식었다.
나는 그때 입을 다물어야 했다.
상황을 정리하고 문제를 풀어보려 했지만,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결국 치킨은 포기했다. 둘 다 속상한 마음을 달래며 김밥천국으로 향했다. 왜 ‘천국’이 들어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모두가 평화롭게 식사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건 오빠의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는 닮아 있었다. 같은 일이 우리 부모님 세대에서도 종종 일어났으니까.
부모님은 늘 메뉴판을 내 앞에 밀어놓으며 물었다.
“뭐 먹을래?”
그럴 때마다 나는 여러 상황을 머릿속으로 계산해야 했다. 생일이면 생일인 사람이 고를 수 있게 슬쩍 양보하고, 결국 메뉴 선택권은 아버지에게 돌아가곤 했다.
부모님과 식사할 때 메뉴를 고를 수 있는 건 드문 일이었다.
오랜만에 만나 애틋함이 남아 있을 때뿐이었다.
나는 이토록 보수적인 한국 집안에서, 미국인으로 자랐다.
답답한 마음에 결국 말했다.
“아빠, 그냥 드시고 싶은 거 시키세요. 제가 고르는 거 아니잖아요?” 부모님이 원하는 것을 모르니 내가 맞춰드리겠다고 말한 것이었다.
그날도 혼났다. 어디, 부모님께 대들냐며 노발대발하셨다. 하지만 요즘은 부모님도 안다. 혼내봤자 소용없다는 걸.
오빠와의 연애는 전혀 다른 기출문제였다. “뭐 먹을래?”라는 질문의 핵심은 단순했다.
오빠는 이미 먹고 싶은 게 있었다. 하지만 나를 사랑했기에, 내가 고르길 바랐다. 사랑과 배려가 충돌하자 그는 눈치로 해결하려 했다. 나는 복잡하게 생각하는 게 힘들었다. 눈치는 나에게 너무 어려운 문제다.
지금 같으면 이렇게 말했을 거다.
“오빠가 사주는 거야? 와, 진짜 멋진 남자네! 초밥 잘 먹을게. 고마워. 다음엔 오빠가 먹고 싶은 거 먹으러 가자.” 오빠가 원하는 것은 내가 기뻐하는 것 하나였기 때문에 살짝 너스레 떨어주면 서로 윈-윈할 수 있다. 하지만 그땐 능숙하지 못했다.
나는 단정하고 논리적으로 말했다.
‘이 상황에선 내가 포기하는 게 맞아.’ 그러고선 조용히 선택권을 그에게 넘겼다. 오빠는 그 행동이 차갑게 느껴졌을 것이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잘 먹히는 게 함정이다.
연애 초반엔 서로 먹으라는 음식을 양보하며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1년이 지나자, 양보도 피로해졌다. 오빠는 연인에게까지 회사 상사처럼 굴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사랑 안에서 ‘기꺼이 양보하는 척’ 하는 거래는 그에게 익숙하지 않았다.
나는 그게 거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지금은 내가 한 발 물러나는 게 맞다고 판단했을 뿐이었다. ‘그게 거래야? 정당방위지! 나중에 내가 원하는 먹으러 가주면 되지. 그게 어려운 일이야?’ — 내 속마음은 숨겼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너무 조목조목 따져 말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상대의 선의를 ‘거절’로 바꿔버렸다. 결국, 그가 반박할 기회를 스스로 잃게 만든 셈이었다. 반박하거나 의견을 말할 수 있는 미국과 한국은 다르단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가족 사이에서조차, 그런 방식은 서운함이 될 수 있다는 걸.
내게 양보는 진심이었다. 진심은 진심으로 돌아온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 믿음은 때론 예상을 벗어났다.
그의 ‘괜찮아’가 나에게 무거웠던 것처럼, 내 ‘표현의 간격’은 그에게 버거웠다.
내가 표현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티를 내지 않는 것도 오빠를 혼란스럽게 했다.
표현을 잘하는 내가 표현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이 그에겐 의외였을 것이다.
똑 부러지고 자기 의사가 분명한 나도 말하지 않고 넘어가는 게 많았다.
무엇을 표현하고, 무엇을 감추는가 —
그게 우리 커플의 다음 과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