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찬에 박한 엄마와 K-장녀/차녀의 생존기
초등학교 때 반에 그런 애가 있었다. 90점을 맞아놓고 우는 남자애. 지금으로 치면 남혐 발언이나 당시에는 사내자식이 계집애처럼 성적으로 우냐며 뒤에서 쑥떡 대기 바빴다. 시험이 어려웠다고 서로의 성적을 낄낄대며 비웃는 아이들을 뒤로 그 아이는 구겨진 90점짜리 성적표를 손에 쥔 채 엉엉 울었다. 잘난 척하길 좋아하고, 이기적이라고 여겨지는 그래서 재수 없다고 늘 뒷말이 나오던. 공부를 잘해 무시할 수는 없지만 인간적으로는 별로라고 평가받던 아이. 반 평균이 70점을 밑돌 정도로 시험이 어려워도 그 아이는 100점을 받지 못하면 어김없이 울었다. 친구들은 그 아이를 싫어했고, 아이는 학창 시절 내내 혼자였다. 급식을 먹을 때는 혼자 앉아 단어를 외웠고, 음미체 시간에는 국영수 과목을 공부하다 선생님에게 인신공격을 당한 적도 있었다. 이동수업을 할 때도, 배드민턴 같은 짝 활동에서도 아이는 늘 마지막까지 혼자였다. 그런 이유로 친구들이 자길 피하는 걸 아는 눈치였지만 그래도 그 아이는 100점을 맞지 못하면 어김없이 울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가 퇴근하며 하늘을 올려다볼 때면 나는 그 아이가 생각났다. 아이는 여전히 90점짜리 성적표를 쥐고 어디선가 울고 있을까.
친구들이 모두 싫어해 그 애 에게 졸업할 때까지 말 한번 붙여본 적 없었지만 늘 울음으로 들썩이는 어깨를 다독여주고 싶었다. 50점짜리 성적표를 쥔 내깟게 감히 무슨 자격으로 걔를 위로하나 싶으면서도. 울지 말라고, 다음에는 반드시 100점을 맞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아니, 실은 100점과 상관없이 수고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건 그 아이에게 위로가 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그 아이를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언니가 그런 아이였기 때문이다. 100점을 맞지 못하면 어김없이 우는 아이. 언니가 기억하는 엄마의 첫 미소. 초등학교 때 수학경시대회에서 전교 1등을 한 언니의 성적표를 본 순간이었다. 그때의 그 전율과 행복을 언니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럽고 행복하다고 여기는 그 순간. 언니가 그날 100점을 맞아온 건 실은 비극이 아니었을까. 그날 이후로, 언니에 대한 엄마의 기준은 점점 높고 다양해져 갔다. 언니가 더 많은 걸 해낼수록 엄마 미소는 주유왕의 포사마냥 더 보기 어려워졌다. 하지만 언니는 계속 노력했고, 더 많이 울었으며, 점점 외로워져 갔다. K-장녀의 탄생을 옆에서 지켜보며 둘째인 나는 잘난 언니와의 비교와 실망에 익숙해졌다. 그렇게 언니는 나의 열등감의 원천이자 롤모델이 되었고, 나는 언니의 뒤를 밟았다.
운 좋게 들어간 대학교에서 일곱 번의 성적장학금을 받으면서 언니 살았던 방식이 옳다고 믿었다. 엄마가 어른들이 그리고 세상이 그걸 칭찬했으니까. 나도 언니처럼 박수받는 삶을 살고 싶었다. 왜 맨날 열심히 살아도 늘 그렇게 서러운 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시험을 보기 전까지 극도의 초조함과 공포에 손을 덜덜 떨며 무언가를 외우고 또 외웠다. 그렇게 당장 바로 앞 목표에만 집중할 때면 적어도 미래에 대한 불안이 나를 엄습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목표를 잘게 쪼개고 달성하기를 반복했다. 시험이 끝나고 결과를 두 눈으로 확인하면 안도감과 함께 긴장이 풀리고 어김없이 위경련이 찾아왔다. 뒤틀린 배를 쥐어 잡고 길바닥에서 기어 겨우 고시원 방에 들어가 진통제를 먹은 후 끝없는 잠을 잤다. 홀로 반 평 남짓 고시원 침대에서 일어나 눈을 뜰 때면 숨이 쉬어지지 않아 괴로워 울었다. 전쟁터가 되어버린 내 삶에 타인은 아군 아니면 적군이었다. 자기 확신보다는 자기 의심만이 성장의 원동력이라 착각했고, 내가 지나온 길을, 떠나간 자리를 자꾸만 되돌아보는 어른이 됐다. 혹여나 놓친 것은 없는지 결과가 나온 후에도 의심과 자기 검열을 아끼지 않았다. 내가 다른 사람이라면 이런 나와 친구가 되고 싶지 않았다. 신경이 곤두선 채 성과에만 목메는 겁에 질린 지루한 인간.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것 같았다. 어느새 나는 100점을 맞아도 우는 어른이 되어있었다.
언니는 지금 대기업 사내변호사로 근무하고 있다. 연봉은 웬만한 또래 남자들보다 높고, 명문대 법대를 졸업했으며 학창 시절 동네에서 언니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언니는 아직 결혼하지 않았지만 고스펙의 남자들에게서만 선자리가 들어온다. 이건 사회에서 정의하는, 그리고 엄마가 바라던 언니의 모습이다. 나는 언니가 원치도 않았던 그 타이틀 이면에 언니가 흘린 눈물들로 언니를 기억한다. 그녀는 학창 시절 시험기간이면 늘 스트레스로 구토를 했다. 변호사 시험을 준비할 때 잠을 못 자 얼굴이 시커먼 채로 졸음을 쫓기 위해 얼음물에 발을 담그고 책을 봤다. 도서관으로 가는 오르막길에 오를 힘이 없어 자리에 주저앉아 운 적도 있었다. 커피나 각성제를 과다 복용해 밤에는 부항을 뜨지 않으면 온 몸의 근육이 아파 잠을 자지 못했다. 엄마는 만족하지 않는 그러나 그 마저도 받기 어려운 90점짜리 성적표는 어느새 합격과 불합격으로 나뉘는 자격증 시험이 되어있었다. 그 시험은 90점의 관용도 허락되지 않았다. 몇 번의 불합격을 받기 위해 언니가 포기한 것들은 그 결과에 드러나지 않았다. 보이지 않으니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10년 전 언니의 꿈은 춤추고 노래하는 연기자였다.
변호사가 된 언니는 더 이상 연기자를 꿈꾸지 않는다. '언젠간 할지도 모르지'라며 어딘지 모르게 서글픈 톤으로 말하지만, 그냥 이제는 흥미가 사라졌다고. 그녀는 다행히 지금의 행복을 찾을 줄 아는 어른이 됐지만, 가끔 연기를 계속했을 자신을 상상하고 가지 못한 길을 그려본다. 그때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옆에 있는 것 밖에 없다. 그리고 과거 연기의 꿈을 꿨던 그녀의 나이가 된 나에게. '계속 글을 쓸 수 있을까. 내가 작가가 될 수 있을까'라는 공허한 질문을 던지는 나에게. 언니는 다음과 같은 말을 건넸다.
아무도 읽지 않는다는 이유로 장문의 글을 쓰지 않다 보면 어느 새벽, 당신은 읽는 이가 기다린대도 긴 글을 쓸 수 없게 됐음을 깨닫게 된다. 아무도 먹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요리하지 않다 보면 혼자만의 식사도 거칠어진다. 당신의 우주는 그런 식으로 비좁아져 간다. - 씨네 21 김해리 기자.
언니와 나는 서로의 우주가 되어준다. 나는 언니가, 언니는 내가 없는 미래를 상상할 수 없다. 우리는 돈독하기보다는 처절하다 싶을 만큼 굳건한 관계다. 우리는 서로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엄마가 해주지 않은 칭찬을 서로에게 아낌없이 퍼붓는다. 물론 싸울 때도 처절하게 밑바닥까지 싸우긴 하지만 그래도 결국은 나를 가장 먼저 그리고 많이 칭찬하는 것은 여전히 언니다. 얼마 전부터 우리는 유튜브 채널을 시작했다.
<시험 끝난 옆집 언니>. 구독자는 겨우 11명이지만, 언니는 이 채널에 진심이다. 칭찬에 박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판단을 의심하는 누군가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는 영상을 찍으려고 노력한다. 돌아보지 마, 네 판단이 맞아. 네가 옳아. 누가 뭐라고 해도 잘하고 있어. 10년 전 나에게, 언니에게. 해주고 싶었던 얘기를 우리는 익명의 누군가에게 전달하고 있다. 나를 진심으로 믿어주고 칭찬하는 단 한 명의 사람이 있다면, 그의 우주는 무너지지 않는다. 내 글이 미약하나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나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늘 첫 번째이자 마지막 독자였던 언니 덕분이다. 영상은 언제나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맺는다.
오늘 하루도 고생했어.
잊지 마, 시험보다 너의 삶이 더 중요해.
Q. 당신이 서러웠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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