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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on Aug 03. 2020

우울함의 자격

쓸모없다고 느껴지는 나에게 쓸모없는 것을 선물하기

 돌이켜 보면 나는 우울할 때 늘 예쁘다는 소리를 듣곤 했다. 우울하니 입맛이 없고 무기력하게 누워서 잠만 자고 살자고 죽어라 운동을 하니 당연히 살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얼굴과 눈동자에는 생기가 없어도 누군가는 예쁘다고 했다. 한국 사회의 여성으로서 그 소리가 듣기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끔찍하게 싫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하는 '예쁘다'와 미디어가 나에게 규정하는 '예쁘다'는 엄연히 다른 의미다. 나는 내가 예쁜 그 상태가 좋으면서도 싫었다. 우울할 때 나는 내 1g이 늘어나는 기분이 끔찍했다. 나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 더 늘어나는 게 싫어서 무언가를 맛있게 먹고 배부른 느낌이 불쾌했다. 그냥 아무것도 먹거나 마시지 않아 점점 말라가면 이대로 이 세상에 처음부터 없었던 존재처럼 사라지거나 날아가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울할 때면 나도 모르게 활짝 웃는 설리의 사진을 찾아보곤 했다. 그녀의 죽음이 얼마나 허무했는지를 생각하면서. 그녀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인스타에 '오늘 왜 신나?'라는 글과 함께 활짝 웃는 그 사진을 가장 좋아하며 아파한다. 사진 속 그녀의 미소가 진심으로 행복해 보임과 동시에 앙상한 팔이 너무도 가슴 아프기 때문이다. 스무 살 늘 죽고 싶다는 충동 속에서 매일을 살아갈 때, 단 하루라도 진심으로 기분이 좋은 날이면 그런 생각을 했다. '매일이 오늘 같으면 죽고 싶지 않을 텐데.' 그 날, 그녀도 그런 생각을 했을까. 그녀가 죽었을 때, 나는 마지막 학기 수업을 듣고 있었다. 그녀와 관한 간단한 시를 적기는 했으나, 나에게 우울증은 너무 오래전 기억이라 글로 적고 싶어도 적어지지가 않았다. 사람은 그렇게 본능적으로 힘든 기억을 삭제시키나 보다. 나는 이번에 찾아온 두 번째 우울증 덕에 내 인생과 달려 나가기 위해 놓치고 있던 중요한 것들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있다.


 그녀가 살아서 활동할 당시 그녀를 보면 스물의 우울증처럼 안쓰럽고 안타깝지만 동시에 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무관심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날파리처럼 미디어가 그녀의 스타성을 탓하며 그녀를 가만두지 않았다. 그녀는 우울할 때 내가 글을 썼듯, 그림을 그렸던 것 같다. 그녀의 그림은 아직 미숙했지만 진정성이 있었다. 절박한 마음으로 그렸으니 계속 그렸다면 자신의 스타성이나 외적인 가치보다 더 큰 위로를 대중에게 건네는 아티스트로 성장했을 것이다. 30살, 40살, 50살까지 밝은 웃음에 세월의 깊이까지 더해졌다면, 얼마나 더 많은 이들을 품어주는 어른으로 늙어갔을까. 악플을 그저 '사람이니까, 실수할 수 있다'며 넘어간 그녀를 나는 스타 '설리'전에 사람 '최진리'로 봐주지 못했을까. 그리고 그 안타까움을 반복할 때면 늘 끝으로 그 생각을 다시 나에게 대입한다. 나의 죽음이 누군가에게 그런 안타까움을 줄 수 있으며, 오늘 하루를 살아있기로 다시 다짐하는 것이다. 그녀는 죽음 후에도 누군가에게 위로를 건네는 슬플 정도로 따뜻한 사람이다.

 

 괜찮지 않음에는 자격이 필요치 않다. 누군가가 더 많이 가져서, 어려서, 예뻐서, 그런 것들이 괜찮지 않다고 말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누구든 사람에게 구조요청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사람이라서 자주 괜찮지 않고 때때로 실수하며 무너지기에 서로에게 서로가 필요하다. 나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넘어졌을 때는 누군가의 손이 필요하다. 사람이라면 다 그렇다. 지금 이 순간도 괜찮지 않은 사람은 얼마나 많을까.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설리를 추모하는 것은 나와 같은 이유일까. 그녀의 환한 웃음 뒤에 가려졌던 괜찮지 않음을 공감하며 괜찮으려고 발버둥 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안타깝고 염려스럽다.


 우울할 때 내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은 고작 날씬하고 예쁜 게 전부였다. 칼 끝에 서있는 기분으로 그 가치를 즐기지 못한다고 내가 이상하다고 할 수 있을까. 너무 쉽게 '예쁜데 왜 우울하냐'는 내과의사에게 이제야 하고 싶은 말이 생각났다. 내 인생의 자율성과 통제권을 상실했다는 실의 빠진 우울증 환자에게 섣불리 왜 네가 우울하냐는 말을 의사라면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인형이 아니고 사람이니까 당연히 우울할 수 있다. 그런 걸 묻는 의사의 처방전이 나를 치료 할리 없다. 나는 질병으로 인해 삶의 의욕을 상실했을 때 다시 살아갈 힘을 병원에서 얻고 싶다. 내가 간과했던 질병의 위험성을 상기시키고, 그것이 내 인생에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말하는 의사를 만나고 싶다. 적당히 약을 처방하는 것이 의사 된 도리의 전부라 믿는 병원에 가고 싶지 않다. 어떤 의사는 사람을 살리고, 어떤 의사는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


 행복하고 안정감이 있을 때 나는 살이 두툼하게 올랐다. 먹고 싶은 건 많았고, 기운은 넘쳐났으며, 쓰고 싶거나 하고 싶은 의욕도 넘쳐났다. 매일 밤을 새우고 할 일이 쌓여있어도 당장 버티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지치지 않았다.  할 일을 할 수 없는 우울증과는 비할바가 아니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낫도록 내 손으로 하루를 채워나갈 수 있는 사람에게는 웬만한 시련은 시련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너무 열심히 달려와 지칠 수 있다. 너무 성실해서 아픈 거다. 너무 열심히 살아서. 당신이 멈추지 않아서, 병이 날까 봐 몸이나 머리가 제동을 건 것이다. 오늘 하루가 아득하고 내일도 이럴 것 같은 기분이 든다면 그건 증상이고 어디까지나 기분이다. 그리고 다시 당신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강제로 당신에게 휴식을 주기 위해 파업 중인 몸과 마음을 학대하는 일을 멈추자. 몸이 아파도 쉴 줄 모르는 사회에서 정신이 아프다고 쉬는 게 얼마나 어려울지 안다.


 하지만 그래도 '서른이 되면 반드시 해야 할 30가지' 같은 책은 당분간 불쏘시개로 태워버리자. 자신이 쓸모없다고 느껴진다면 나에게 쓸모없는 것을 사줘야 한다. 팬시점에 초등학생들이나 살 법한 스티커나 덕질하는 아이돌의 굿즈 혹은 배스킨라빈스에서 펭수 아이스크림을 파인트로 혼자 사 먹자. 그리고 받은 펭수 스티커를 회사 책상에 덕지덕지 붙여보자. 과장이 지랄을 하든 말든. 5살 때 어른들이 나에게 해줬으면 하는 것을 오늘 나에게 해주자. 월급은 그러라고 받는 것이고, 직장도 그러라고 견디는 것이다. 자아실현은 회사에서 하는 것이 아니다. 남들 눈에는 쓸모없어 보이지만 나에게 반드시 행복을 주는 쓸모없는 것을 사줄 것. 방점은 '쓸모없음'에 있다. 의식주에 해당되는 것은 선물이 될 수 없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무너진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출처 : 핫트랙스의 토닥토닥 스티커 시리즈, 저는 7 시리즈를 구매했습니다. 졸귀탱


 방충망을 열고 창밖을 오래 내다본 탓에 그 사이에 들어온 날파리들이 온 집을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밖에 나가기 싫은 날은 하루 종일 그놈의 날파리를 잡아댔다. 다 없어져라. 그때의 기억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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