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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퍼거북 Aug 18. 2020

하와이 Day 6: 와이콜로아

하늘도 땅도 붉게 타오르던 날

2018.8.3.(금)


쉐라톤 코나(Sheraton Kona Resort) 체크아웃 - 라바 튜브 - 와이콜로아(Waikoloa): 파니올로 그린즈(Paniolo Greens) - 퀸즈마켓(Queens Marketplace)


쉐라톤 코나의 마지막 날이다. 아이들은 마지막 날 아침까지 부지런히 일어나서 호텔 수영장을 즐겼다. 레크리에이션 룸에 가서 보드게임도 하고, 체크아웃하고 이쁜 숙소 주변도 둘러보며 한참을 놀다가 천천히 나왔다.  

    

쉐라톤 코나 수영장 마지막 수영: 다이빙과 워터슬라이드는 언제나 즐겁다.

처음 계획대로라면 화산 숙소로 이동했겠지만, 화산 폭발로 화산공원이 폐쇄되어 여행 전 급하게 다시 잡은 와이콜로아 숙소로 목적지를 맞추고 출발했다. 


이동하는 길에 오가면서 여러 번 봤던 라바 튜브 길에 차를 세우고, 모험 놀이를 했다. 까만 동굴 밑으로 내려가서 기어올라오고, 화산돌로 돌쌓기도 해 보고... 똥꼬1호와 2호는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물어봐도 비밀이라고 안 말해준다. 벌써 엄마에게 말해줄 수 없는 비밀 소원이 생겼나 보다. 

라바 튜브


와이콜로아는 빅아일랜드의 대규모 리조트 단지이다. 와이콜로아로 이동하는데 차가 엄청 막혔다. 퇴근시간도 아닌데 이상했다. 정체의 이유는 나중에 알게 되었다.


남편이 예약한 숙소라 나는 새 숙소 파니올로 그린즈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미국 2층짜리 아파트 같은, 옆집과 살짝 붙어있을 뿐이지 우리만의 단독 주택 같은 파니올로에 첫눈에 반해버렸다. 바깥에 난 계단으로 2층 우리 집에 들어가면, 복층으로 두 개 층을 쓸 수 있었다. 방이 세 개에 넓은 침대도 세 개, 화장실 두 개, 주부들의 로망 넓은 전면 부엌과 거실까지. 애들은 계단을 계속 오르락내리락하며 뛰어다녔고, 계단 밑 창고는 비행기에서 해리포터 1편을 갓 읽은 똥꼬1호에겐 흥분되는 장소가 아닐 수 없었다. 다들, 우리만 즐기긴 너무 아깝다고, 여기에 초대하고 싶은 사람들 리스트를 읊었다. 


어제 모래바람보다는 약해졌지만 여전히 바람이 꽤 불었는데 애들과 남편은 바로 수영장으로 갔다. 아담하지만 깊이가 꽤 깊은 수영장이었다.     

수영장에서 본 석양이 환상적이었다. 하와이에서 처음 만나는 석양이었다. 똥꼬2호는 이 날 아빠곰한테 자유형을 배웠다. 자기 키도 훌쩍 넘는 수영장 끝에서 끝까지 혼자 힘으로 갔다. ‘아빠 있는 데까지만 와봐’ 하고 자꾸만 자꾸만 뒤로 조금씩 물러나는 아빠를 끝까지 쫓아간다. 우리 아들! 엄마랑 다르구나. 수영 3개월 배우고 온 엄마도 못 하는 것을 하루 만에, 아니 한 시간 만에 배웠다. 

파니올로 그린즈 수영장: 석양이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석양이 드러낸 나무 뼈대 실루엣에 반한 날.

석양이 갈수록 참을 수 없이 아름다워져서 우리는 비치타월을 걸치고 뛰쳐나갔다. 추워하는 똥꼬1호는 자쿠지에 있기로 하고, 나, 아빠곰, 똥꼬2호 셋이 석양이 잘 보이는 곳으로 뛰어갔다. 미리 와서 삼각대를 세워놓고 전문가 포스로 사진을 찍던 아저씨의 고요한 시간은 우리 때문에 끝이 났고, 우리는 떠들썩하게 석양을 즐겼다. 아빠곰이 ‘이런 건 같이 봐야 해.’하며 자쿠지에 있던 똥꼬1호를 데리러 갔다. 마지못해 따라온 1호도, 금세 석양에 취했다. 아이들은 비치타월을 슈퍼맨처럼 걸치고 뛰어다니며 딸꾹질을 할 때까지 웃었다. “엄마, 누가 석양에 웃음가스를 탔나 봐.”했다. 석양 한 조각으로 모두가 행복해졌다. 나는 시인 같은 아들의 말을 기억하고 싶어서,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웃음가스, 석양 한 조각’을 냅킨에 꾹꾹 눌러썼다. 

파니올로 그린즈에서 만난 하와이 첫 석양


해가 완전히 넘어갈 때까지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석양을 즐기느라 시간이 많이 갔고, 배는 고프고, 바람은 여전히 세게 불어서 숙소 밖에 있는 그릴을 쓸 엄두가 안 났다. 우선 오늘 저녁은 사 먹고 내일, 숙소 안에서든 밖에서든 고기 구워 먹을 장도 볼 겸 퀸즈마켓으로 출발했다. 그런데 마켓으로 가는 길 왼쪽에 불이 화산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는 게 아닌가! 창을 여니 연기 냄새가 강하게 났다. 아까 차가 밀린 것도 이 불 때문이었구나 싶었다. 그때는 없었는데! 몰랐는데! 순간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다시 코나 쪽으로 돌아가야 하나, 우리 숙소에서 도로 하나 두고 있는 덤불 밭인데 이 정도 바람이면 불이 숙소 쪽으로 넘어오는 건 순식간일 것 같았다. 퀸즈마켓에서 점원에게 물어보니, 불이 났는데 지금 끄고 있는 중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숙소에서 찍은 bush fire(산불)

애들이 배고파해서 맛집을 고를 여유가 없었다. 피자로 대충 배를 때우고 장을 보러 퀸즈마켓 슈퍼에 갔다. 피자 기다리는 동안 똥꼬1호와 미리 장 볼 것을 둘러봤다. 미소된장과 고기가 너무 맛있어 보였다. 꼭 사주겠다고 약속하고 와서 피자를 먹고 가니 그 사이에 미소된장과 고기가 영업시간이 끝나 판매가 종료됐다고 했다. 똥꼬1호가 너무너무 실망했다. 미소된장을 정리하러 솥째로 들고 가던 일식집 셰프를 붙잡고 ‘Please, my son really wants to have Miso soup.(제발요. 아들이 너무 먹고 싶대요.)’하며 팔아달라고 애걸해서 한 그릇을 샀다. 고기 장은 내일 다시 보기로 했다. 


돌아오는 길에 보니 불이 번져서 숙소와 더 가까워져 있었다. 아까는 잘 들리지 않던 헬기 소리, 구급차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연기 때문인지 기침이 계속 나왔다. 프런트에 가서 상황을 물어보니 3~4일 전부터 시작된 불이고 숙소 바로 앞에 소방서가 있어서 괜찮을 거라고 했다. 이미 탈 게 다 타버려서 불이 도로를 건너 넘어올 수 없다고 했다. 내가 한밤중에 긴급대피 상황이 발생하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난 전화번호도 없고 연락받을 길이 없다고 하니 그런 경우엔 자기들이 마이크로 크게 방송을 하고, 집집마다 문을 쾅쾅 두드려주겠다고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농담조로 한 말이었는데 내가 너무 심각하니 프런트에 있던 사람들도 웃음을 참았던 것 같다. 이렇게 불이 나는 일이 자주 있는지 물어보니 데스크에 앉은 세 명 중 가운데 앉은 언니는 그렇다고 했고, 그 뒤에 앉은 아저씨는 입 모양과 고갯짓으로 아니라고 했다. 그린샌드비치 기사 아저씨도 이렇게 바람이 많이 부는 건 흔한 일이 아니라고 했고, 파니올로에서는 이렇게 불이 나는 건 흔한 일이 아니라고 하는데, 도대체 왜 내가 여행할 때 딱 맞춰서 모래바람이 불고, 불이 나는 걸까? 순간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계속 불안해하자 제일 앞에 있던 언니가, 하와이 뉴스를 빠르게 접할 수 있는 앱 이름과, 소방서 전화번호를 포스트잇에 적어줬다. 내 불안이 우습고 호들갑스러워 보일 수 있지만, 드러나게 비웃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들, 내가 안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준 그 언니에게 지금도 고맙다. 


숙소에서 늦은 집밥을 먹으며, 우리는 좀 침울해졌다. 아이들도 불안해했다. 하와이 카페에 훨훨 타오르는 사진과 함께 문의 글을 올리고, ‘빅아일랜드 뉴스 나우(Big Island News Now)’ 앱을 깔고 정보를 찾아보았다. Bush fire(산불)는 잡혔다가 번졌다가를 반복하고 있다고 했다. 190번 고속도로가 막혀서 우회도로를 이용해야 하며, 호흡기 질환이 있는 사람은 조심하라고 했다. 10분이 멀다 하고 앱을 들락날락하던 우리는 bush fire를 2위로 미루고 1위로 등극한 뉴스를 보게 되었다. 무려 4등급짜리 허리케인이 빅아일랜드 힐로로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딱 우리가 힐로에 있을 바로 그 시간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4등급 허리케인이 오면 지붕이 날아가고 야자수가 뽑히니 주민들과 관광객은 뉴스에 귀를 기울이고 2주치의 식량을 준비하라고 했다. 울고 싶었다. 그냥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서 돌아가고 싶어요.’ 하는 기도가 저절로 나왔다. 산불에는 그렇게까지 심각해하지 않았던 남편도 허리케인 소식에는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나랑 남편이 달랐던 점은, 나는 ‘생존’을 걱정하고 있었던 데 반해 남편은 ‘여행’을 걱정했다는 것이다. 


나는 안전하기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여행 일정이 어그러지는 것은 고려할 여유도 없었던 반면에, 남편은 힐로에서 하려고 했던 헬기투어, 마우나케아 별보기를 못하게 되면 어떻게 하지 하는 걱정을 했다. 남편은 빅아일랜드에서 오아후로 이동해야 하는 비행기가 제 날짜에 뜨지 못해서 오아후로 넘어가지 못하면 아무것도 못하고 날아가는 그 일정이 아까워서 어쩌나 걱정했다. 한편으로는 남편이 철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왠지 남편 얘기를 들으니 큰 나쁜 일은 안 생길 것 같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리고 나만큼 불안해하지 않는 남편이 부럽고, 또 고마웠다.     

나는 최대한의 나쁜 일을 가정하는 사람이고, 남편은 ‘이 정도 행운은 나에게 분명히 주어질 거야. 나는 더 큰 즐거움을 누리고 싶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사업장 문을 3주간 닫는 큰 결심을 하고, 결혼 10주년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어렵게 용기 내어 온 여행인데, 이 정도는 누리고 가야지 하는 순수하고 당당한 바람이 있었던 것이다. 남편이 나와 같은 정도로 불안해하고 그 불안을 입으로 뱉는 사람이었으면 얼마나 나는 더 불안해졌을까? 이런 남편이어서 참 좋다.     


여행 와서 하루하루의 위험을 겨우 넘기고 감사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지만, 막상 밤에는 쓰러져 자느라 기도 한 번 못하다가, 오늘은 온 가족이 침대에 모여서 기도했다. 불이 꺼지게 해달라고, 허리케인이 진로를 바꾸도록, 아니 또 다른 누군가에게 피해가 가면 안되니 아예 소멸되도록, 기도했다. 기도할 때마다 ‘아토피 없어지고 안 가렵게 해주세요. 우리 가족 건강하게 해주세요.’ 수준의 단순한 문장만 기계적으로 읊어대던 똥꼬1호가 청산유수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불이 다 꺼지고, 이쪽으로 넘어오지 못하게 해주시고 바람도 잠재워주세요. 허리케인도 안 오게 해주세요. 우리가 즐겁게 여행을 잘 마치고 안전하게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세요.’ 기도의 지경이 넓어졌다.  

    

아! 들으셨죠? 아이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걸 보여주세요.   

   

나의 기도는 이 두 문장으로 끝났다. 아들이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었다.     

소화기를 껴안고 자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혹시 밤에라도 대피하면 어떤 짐을 들고 나가야 하나, 생존배낭을 싸 두어야 하나 머릿속이 복잡해서 잠자기는 글렀다고 생각하던 순간, 걱정하느라 피곤했는지 난 결국 아무 대책 없이 푹 잠이 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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