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카데로 광장(Le Trocadero et son esplanade)에서 에펠탑을 보고 돌아선 뒤였다. 깜깜해지고 에펠탑에 불이 들어오면 에펠탑이 거대한 체다 치즈 색으로 변한다고 했다. 하지만 아파서 숙소에 누워있는 둘째가 걱정 되서 얼른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회색 하늘에 옅은 주황색 탑모양만 보고 얼른 돌아섰다. 그런데 또 딩딩딩, 내 몸이 신호를 울린다. 화장실이 가고 싶어졌다.
파리는 지하철에도 화장실이 없으니, 일단 근처 식당에라도 급한 대로 들어가야 했다. 화장실만 쓸 심산으로 혹시 음식을 포장해갈 수 있냐고 물으니 뱃속에 넣어가야 한다며 웃는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에스프레소, 아이스티, 에비앙을 시켰다. 웨이터가 에비앙을 따주려는 걸 기겁해서 말리곤 다시 꼭꼭 닫았다. 내가 그걸 마시면 집에 가는 길에 또 화장실을 찾는 무한쳇바퀴가 시작될 것만 같았다.
뜯지도 못한 에비앙을 꼭 쥐고 창밖을 바라보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꽤 많이 내리는 게 금방 멈출 것 같지는 않았다. 어둑해지는 거리에 사람들의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어라, 그런데 거리에 우산이 보이지 않는다. 모두 가방에서 모자를 꺼내 쓰거나, 무심하게 후드를 툭 뒤집어썼다. 그도 아니면 그냥 걸었다. 바쁘게, 씩씩하게 걸어가는 프랑스 사람들의 방광은 모두 안녕할까?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화장실 쓰기도 어려운 도시인데. 오가는 젖은 발걸음사이로 촉촉한 빗물들이 보도블록을 반짝거리며 채웠다. 가로수와 바닥이 불빛에 반사되어 오렌지색으로 물들었다. 박물관의 명화들 속 붓의 터치처럼 물기가 도시로 스며들고 있었다. 하, 탄성이 나왔다. 그때였다. 이렇게 아름답고도 불편한 파리에 대해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이.
비가 그치고 나오니 마침 저녁 7시 5분전. 정각이면 에펠탑에 반짝반짝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불이 들어온다. 우리는 결국 웃으며 다시 에펠탑으로 발길을 돌렸다. 나는 화장실 덕에 기어이 그 장면을 보고야 말 운명이었던 것이다. 드디어 보았다. 반짝이는 진한 체다치즈색 에펠탑!
여행 속 오차가 주는 기쁨은 크다. 늘 어긋나버리는 여행계획은 나의 건강상태 때문이 아니라 나의 건강상태 덕분에 뜻밖의 행복한 순간을 발견하는 행로였다.
이번 브런치북에서 나는 짧은 파리 여행기를 쓰려한다. 다른 여행기들처럼 파리에 대한 정보가 아주 많거나 파리 명소들에 대한 세세한 후기들은 아니다. 분명 세상 어딘 가에 존재하는 나처럼 몸이 아파서 쉽게 떠날 마음을 못 먹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내 보자고 말하고 싶어 써보는 작은 에피소드들이다. 물론 도움이 될 만한 여행 팁들도 최대한 포함하려 한다.
나는 프랑스어를 한 마디도 못한다. 심지어 이번엔 여행계획 준비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병원만 오가며 일단 아프지 않아야 떠날 수 있다고 믿고 건강관리에만 집중했다. 그러나 연이은 연휴와 여러 가지 사건 사고로 그닥 맘편히 건강을 챙기지 못했다. 다행히 이번 여행은 프랑스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르 꼬르동블루 출신이라 이쪽 음식에 대해서도 잘 알며, 현재 프랑스어학원을 운영하며 유튜브까지 하고 있는 시누이가 함께 떠나게 되었다. 원래는 큰 딸 대학입학 기념으로 남편 학회를 따라와서 우리 모녀들만 따로 여행하자고 내가 호기롭게 제안을 했더랬다. 그러다 시누이가 생각나 같이 가자고 얘기했는데, 지나고 보니 정말 이보다 더 큰 천운이 없었다. 시누이가 없었다면 정말 나는 거기서 ‘미아’, 아니 ‘미줌마’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역시 그냥 죽으란 법은 없다. 시댁식구지만 늘 든든한 지원군인 언제나 고마운 시누이다.
약 봉투들을 챙기며 여행준비를 시작했다. 가족들을 위한 상비약도 필요했지만 내 약들만 세 봉지였다. 아침 공복에 먹는 방광유산균, 고지혈증 약, 과민성방광약과 진통제, 잘 때 먹는 신경통약, 그 사이사이 먹는 항생제에, 관절 아플 때 먹는 소염진통제 등등 진짜 요일별로 분류해도 너무 많았다. 헷갈려서 시간대별로 표시를 했다. 그런데 프랑스는 시차가 있네? 의사선생님이 한국시간으로 지키라고 했으니 이건 뭐, 자다 일어나서 먹어야 할 판이었다. 약만 싸고 나면 다른 짐은 누워서 떡먹기다. 오랜 유학생활 덕인지 짐은 금방금방 잘 싼다.
준비의 마지막은 주사. 나는 면역이 날뛰고 관절이 아픈 병이 있어서 3주에 한 번 휴미라라는 면역억제제를 맞는다. 집에서 허벅지나 배에 자가 주사의 형태로 찌르는데, 마침 여행 전날이 주사 맞는 날이었다. 이걸 맞고 나면 방광염이 조금 심해지는 경향이 있는 거 같지만 그래도 여행가서 관절이 아프면 안 되니까 소독솜을 문지르고 허벅지에 콕 주사를 찔렀다. 찌르르- 주사약이 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온 몸에 퍼지는 약 느낌. ‘이제 진짜 떠날 때가 되었구나!’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렇게까지 아프면서 왜 떠나고 싶냐고?
단순하다
나이가 더 들면 더 아플 테니깐.
그리고 무엇보다 파리가 궁금했다. 얼마나 좋길래 다들 파리~파리~ 하는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