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미영 씨가 선택할 수 있는 다른 길은 본인이 주 신청자가 되는 방법뿐이었다. 영주권을 후원해줄 수 있는 고용주를 찾아서 취업 비자 후원을 받고 그 직장에서 1년 이상 일한 후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었다. 하지만 김 미영 씨의 경력으로는 영주권 후원을 해줄 고용주를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고용주에게 몇천만 원의 뒷돈을 주거나 아이들 뒷바라지는 포기하고 하루 12시간 이상 노예처럼 고된 노동을 하는 조건으로 고용주를 찾아볼 수는 있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았다.
김 미영 씨가 전문 대학교 정규 과정에 들어가면 아이들은 학비를 내지 않는다. 2년제 이상의 학교 졸업 후 취업비자를 받아도 아이들 학비는 안 낸다. 엄마가 학교 다니는 2년, 전문대 졸업 후 받는 3년짜리 취업비자를 받게 되면 총 5년은 아이들 학비를 내지 않아도 된다. 1년 이상 일한 후 그 경력으로 영주권 신청이 가능하다. 흔히 말하는 경력 이민, 유학 후 이민이다. 엄마 학비는 2년 과정, 연간 15000불 정도 된다. 2008년도에 생긴 새로운 제도였고 그때만 해도 이 제도가 얼마나 지속될지 예측할 수 없었지만 김 미영 씨에게 제안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었다.
김 미영 씨는 새롭게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지만 캐나다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게 정착에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은 했었다. 영주권을 받고 난 후 남편이 캐나다에 오면 집안일을 나누어하면서 수월하게 공부를 하려고 했는데 시기를 몇 년 앞당겨야 하는 것이다. 김 미영 씨는 오롯이 아이들을 혼자 돌보면서 못하는 영어로 새로운 공부까지 해야 하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어떤 전공으로 어느 학교에 가는 것이 좋을지 상의를 했다. 한국에서 수학을 전공했고 교사를 오래 했으니 전공과 연관 있는 공부를 하면 수월하다. 하지만 단기간에 영주권을 받으려면 방향을 바꾸는 것이 효율적이다. 유아 교육전공이 좋겠다는 결론을 냈다. 아이들을 예뻐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교사로서 소명의식 같은 것은 있었고 천직이라고 생각했었다. 대상은 다르지만 다시 교사가 되는 것도 좋은 일이다. 두어 시간 만에 김 미영 씨는 자신의 상황을 빠르게 정리하고 운명처럼 새로운 길을 받아들였다. 어떤 일이든 판단하고 결정하는데 시간을 길게 끌지 않는 성격이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으려 애쓰지 않는 스타일이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설명을 했다.
“ 한 가지 중대한 문제가 있는데 남편분은 5년 이내에 영주권 신청을 못합니다. 그러니까 5년 이내에 영주권 신청 자격이 된다고 해도 남편이 ‘서류상’ 가족으로 남아 있다면 가족 모두 영주권을 받을 수 없습니다. “
“서류 상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럼 서류상 이혼하면 가능하다는 얘기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영주권 수속을 시작하려면 학교 졸업하고 취업도 해야 하니 빨라도 3년 후쯤이 될 겁니다. 이혼을 하더라도 그 무렵에 해도 됩니다..”
“ 남편과 제가 이혼을 한다면 남편은 영원히 캐나다 영주권을 받지 못하게 되나요?”
“아닙니다. 재혼하고 배우자 초청으로 영주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혼했던 사람과 재혼해도 배우자 초청이 가능할까요? "
“가능합니다. 실제 사례도 몇 건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김 미영 씨가 말하는 “알겠습니다” 가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었지만 본인이 등록할 학교의 지원 일정과 학생비자를 받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 등 구체적인 진행에 관한 안내를 듣고 학생 비자 수속 대행 계약금을 내고 돌아갔다. 결국 내 고객이 된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일찍 전화가 왔다. 남편과 ‘서류상 이혼’에 대해서 상의했고 곧 이혼 절차를 밟을 예정이라고 했다. 영주권을 받지 못하면 다 죽어 버리자고 협박처럼 말하고, 죽을 수는 없으니 이혼부터 하자고 했다. 나중에 혼인 신고하고 남편도 영주권을 받을 수 있도록 해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남편을 아이 대하듯 어르고 달랬다.
남편은 부모님들과 아이들에게는 비밀로 해 달라는 당부와 “미안해서 죽겠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김 미영 씨는 뭐든 결정과 실행이 빨랐다. 서두를 필요 없다는 내 말에 막다른 곳까지 쫓긴 사람은 오래 고민할 겨를이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기러기 가족들 중에는 이혼을 이미 했거나 이혼을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상황(보통은 경제적인 이유가 대부분이다)에 유학을 빌미로 별거를 시작하는 부부도 있다.
그들에게 이혼에 관한 단상이나 절차에 대한 얘기를 종종 듣는다. 합의 이혼 절차는 매우 간단하고 신속하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자칫 학생 비자를 신청하기 전에 가족관계 증명서와 혼인 관계 증명서에서 배우자의 이름을 지워버릴까 봐 걱정스러웠다. 배우자의 재정적 후원을 입증해야 하고 공부를 마치고 돌아갈 가족이 한국에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서둘지 말라고 당부했다.
내 설명에 김 미영 씨는 “알아서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무엇이든 명쾌하고 신속하고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고 알아서 잘하는 사람이니까 알아서 하겠지, 하고 생각했다. 김 미영 씨는 2년짜리 유아교육 전공으로 입학 허가서를 받았고 한국에 가서 학생 비자를 받아 왔다. 아이들은 동반 비자를 받았다. 남편이 흔쾌히 이혼을 해주겠다고 할 때와는 사뭇 다르게 “그러다가 나 혼자만 한국에 남게 되는 것은 아니냐" 라며 걱정을 하더란다. 또 어르고 달래서 설득하느라 고생했다고 웃으면서 얘기했다.
김 미영 씨는 가끔 사무실에 찾아와서 “실장님 사무실 커피가 제일 맛있어요. 커피 한잔 주세요” 했다. 캐나다에는 팀 홀튼이라는 도넛과 커피를 파는 집이 성업 중이고 그 집 커피가 고작 1불 50센트(약 1300원) 면 살 수 있지만 그 돈마저도 아까워서 집에서 인스턴트커피를 마신다고 했다. 학교에 가면 팀 홀튼 , 스타벅스, 그보다 비싼 커피집 마크가 찍힌 종이컵을 동료학생들이 들고 다니는데 김 미영 씨는 스테인리스 텀블러에 인스턴트커피를 타서 가지고 다닌다고 했다.
“싱거워서 무슨 맛인지도 모르겠는 팀 홀튼 커피나 쓰고 독한 스타벅스 커피보다 봉지 커피가 훨씬 맛있어요. 그리고 실장님 사무실에 와서 가끔 얻어 마시면 좋고요"
대기업 다니는 남편이 월급을 꼬박꼬박 김 미영 씨의 한국 통장으로 입금을 했고 교사로 일하면서 벌어둔 돈을 쓰면 그렇게까지 스스로를 혹사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편하게 살다 보면 마음이 해이해질 것 같다고 했다. 학교 공부는 영어 때문에 생각보다 힘들다. 날마다 밤늦게까지 공부를 해야 따라잡을 수 있다. 아이들 등하교도 엄마가 같이 해줘야 하니 아침마다 전쟁을 치르는 것 같다. 토론토 겨울은 혹독하게 춥고 월세와 집값은 자꾸 올라서 더 오르기 전에 집을 사야 할 것 같은 조바심이 들고 인간관계도 만만치 않다. 특히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한인 들과의 관계가 끊을 수도 없는 애증의 관계라서 가장 힘들고 무엇 하나 쉬운 것이 없다. 마음에 해이해지면 모든 것이 다 망가질 것 같아서 끈을 팽팽하게 조이고 산다는 것이다. 그래도 한 가지쯤 이른바 ‘소확행’이 있으면 위안이 되지 않겠느냐는 내 말에 대뜸 손자병법에 대해서 얘기를 꺼냈다.
“살아 나올 수 없는 땅에 던져진 뒤라야 생존하는 법이며 사지에 빠뜨려진 뒤라야 살아남는 법이다. 무릇 장병들은 그런 위험한 상황에 처해야 목숨을 걸고 싸워 승리한다. 유방과 한우가 전쟁을 할 때 배를 타고 강을 건넌 다음 배에 구멍을 뚫어 모두 침몰시키고 막사도 불 지르고 양식은 3일 치만 남겼데요. 침주 파부(沈舟破釜). 고사 성어의 유래죠. 배수진, 물러설 곳 없이 싸워야 이긴다잖아요. 이순신 장군도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라 하고 싸운 것처럼 저는 이혼도 했고 재산도 아이들 양육권도 전부 남편한테 줬어요. 제가 영주권을 받지 못한다고 해도 남편이 저를 이렇게 버려두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저는 모든 것을 잃게 될 거라는 각오로 영주권 받을 때까지만 이렇게 살려고요. 영주권 받은 후에는 남편도 올 테고 그때는 지금보다 편해지겠죠.”
김 미영 씨의 말을 들으면서 소름이 돋았다. 죽을 각오를 하고 살아야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 이민생활이다. 영주권을 받기 위해 공부나 일을 하다 보면 저절로 그렇게 살아진다. 절대로 낭만적이지 않은 삶이라는 것을 이민을 꿈꾸는 이들이 알기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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