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시대, 감정의 빈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잊히는 감각과 존재의 이유

by 발가락꽃




현대 사회는 정보로 넘쳐나지만, 우리의 감각은 점점 피로해지고 있다.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정보를 손에 넣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생성형 AI를 이용해서 거의 모든 질문에 즉각적으로 답을 찾을 수도 있고, 수년간 쌓인 타인의 노하우를 클릭 몇 번으로 내 것으로 만들 수도 있다.




또한 설명 영상과 요약 콘텐츠를 보고 복잡한 개념을 짧고 빠르게 이해할 수도 있다. 이제는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마치 ‘충분히 이해한 것 같은 착각’을 하며 살아가는 시대다.




예를 들어, 유튜브만 보더라도 과거에는 고가에 거래되던 맛집 레시피나 전문가들의 노하우가 무료로 공개된다. 의사, 변호사, 심리상담가를 비롯해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기꺼이 자신만의 전문 지식을 나누고, 일반인들도 정치, 감정, 삶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해설하며 꿀팁을 공유한다. 우리는 평소 팔로우하던 인플루언서가 추천하는 화장품이나 책, 생활 아이템을 자연스럽게 신뢰하게 된다. 그들이 보여주는 삶이 진짜처럼 느껴지고, 그로부터 생긴 친밀감은 때로 판단력을 흐리게 만든다.



문제는 이 믿음이 독이 되는 순간도 있다는 점이다. 이 정보의 바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짜와 가짜, 가치 있는 것과 단순히 소비되는 것을 구별해 낼 수 있는 능력이다. 연출된 삶 속에서 비롯된 조작 정보가 순식간에 ‘진실’처럼 퍼져나가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청년 주식부자’로 알려졌던 이희진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는 자신이 성공한 펀드매니저인 것처럼 연출하며, 사기 행각을 벌였다. 꾸며낸 삶을 온라인에 노출하고, 그로부터 형성된 신뢰를 기반으로 잘못된 금융 정보를 퍼뜨리며 대규모 주식 사기를 저질렀다.




이와 같은 사례는 생각보다 많다. 특히 유튜브에서는 ‘처음 한 사람이 퍼뜨린 잘못된 정보’가 여러 크리에이터들에 의해 반복되며 사실처럼 소비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른바 정보의 ‘재양산’이다. 이 과정에서 왜곡된 정보는 순식간에 ‘여론’이라는 이름을 달고, 진실처럼 포장된다.




과거에는 정보가 제한되어 있었다. TV나 라디오에서 정보를 듣거나, 책을 통해 찾아야 했다. 그리고 정보를 생산해 내는 사람들은 익명의 존재가 아니었다. 기자, 작가처럼 자신만의 이름과 책임 아래 정보를 제공하던 이들은, 다양한 사실을 종합하고 정제해 신뢰할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공신력 있는 전문 정보 제공자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무슨 정보든, 어떤 주제든 검색 한 번이면 찾아낼 수 있는 시대다. 정보의 접근은 쉬워졌지만, 오히려 정확하고 믿을 만한 정보를 찾는 일 자체가 새로운 ‘노동’이 되었다.




정보가 이렇게 풍요로운 시대에, 이상하게도 감정은 점점 가난해지고 있다. 영화를 유튜브 리뷰로 대신 보고, 감동적인 뉴스에 ‘좋아요’를 누르면서 금세 다음 콘텐츠로 스크롤을 넘긴다. 타인의 고통과 즐거움의 실시간 중계를 보며 공감을 하지만, 공감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이 많은 것을 오롯이 느낄 여유는 없다.




영화나 드라마의 전개는 점점 빨라지고 있으며 지루하다고 생각하면 두 배속으로 보거나 건너뛰기를 클릭한다. 한때는 작품을 온전히 보면서 감정을 느껴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15초 만에 감동하고, 또 다른 15초짜리 감정을 찾아 화면을 넘긴다. 정보의 속도가 감정의 속도를 압도한다.




하지만 인간은 본래 ‘여운’의 존재이다. 커피에 떨어뜨린 설탕이 녹기 위해서만 시간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감정을 받아들이고, 소화하고, 공감하기 위해서도 시간이 필요하다. 첫 키스의 순간, 출산의 순간 등 감동적이고 설레는 순간의 작은 것 하나조차 기억할 수 있는 이유는 이 특별한 순간의 감정이 느리고 길게 진행되기 때문에, 그래서 감정이 깊게 마음속에 자리를 남기기 때문이다.




모두가 동일하게 물리적 시간을 경험하지만 감정의 시간은 매 순간 다르다. 그래서 문학과 영화에서 강렬한 순간은 이 감정이 일어나게 된 과정을 묘사하는 방식으로 길게 진행된다. 예술에서 표현하는 감정은 우리가 느껴봤을 법한 길고 강한 시간이다.




그러나 오늘을 사는 우리는 특별한 순간마저도 압축한다. 그래서 감동적인 영화나 드라마도 쇼츠나 유튜브 요약본으로 접한다. 핵심만 보는 것에 중독된 뇌는 영화, 드라마를 처음부터 끝까지, 생략 없이 온전히 보는 데 힘들어한다. 현대인의 뇌는 멀티태스킹에 익숙해졌지만 정신은 표면적이다. 감정은 지속되지 않고, 경험은 얕아지고 있다.




이것은 결국 존재의 이유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인간은 생각하고, 느끼고, 관계 맺으며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실감한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했을 때의 뜻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정보를 소비하기에 급급해서 이미 느꼈던 혹은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도차 되돌아볼 틈이 없다.




우리는 존재하기보다 ‘접속’하고, 살아가기보다 ‘업데이트’하며, 느끼기보다 ‘공유’하려 든다. 그 결과, 인간이 본래 지니고 있는 마음의 근육은 서서히 퇴화하고 있다. 느끼고 머무는 능력, 공감하고 깊어지는 힘은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이런 현상은 교육과 개인 성장의 구조마저 퇴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학생들은 이제 긴 글보다 짧은 영상에 익숙하고, 인내심보다는 즉각적인 만족에 길들여지고 있다. 삶은 조급해지고, 인생은 요약본처럼 축소된다. 사유는 얕아지고, 감정은 평면화된다. 이렇게 축약된 존재의 경험 속에서 우리는 과연 ‘나’로 살고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고전적인 질문은 우리 시대에는 낡고 쓸데없는 질문처럼 여겨진다.




‘알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우리는 점점 자신을 잃어간다. 하지만 더 많은 정보를 얻고도 더 깊은 공허를 느끼는 이유는 자신의 실존에 문제를 제기하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이 태초부터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단순한 감상이나 자기 계발이 아닌 ‘느끼는 존재로서의’ 나를 발견하는 시간이 필요한 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철학은 여전히 유효하다. 철학은 질문에서 시작한다. 비록 질문의 답은 찾지 못하더라도 질문하고 사유하는 시간 자체가 삶을 더 깊이 있게 만든다. 하지만 우리는 질문하는 법을 잃어버렸다. 질문이 떠오르기도 전에 수많은 ‘정답’이 정보의 형태로 우리 안에 흘러들어온다.




하지만 삶의 조건은 달라졌지만 인간 존재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자신의 실존에 질문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리고 천천히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답하면서 자신이 잃어버린 마음의 근육을 찾는 것, 이게 바로 우리가 다시 붙잡아야 할 ‘존재의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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