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쉼을 연습하지 못했다

인문학, 예술, 축제를 통해 프랑스가 쉼을 맞이하는 법

by 발가락꽃



많은 한국사람들이 유럽에 나가 가장 먼저 느끼는 점은 ‘서양인들은 참 느긋하다’는 것이다. 공원에서 산책하거나 책을 읽는 이들, 은퇴를 목표로 일하는 사람들… 프랑스에서 학업과 직장 생활을 했던 나에게 누군가가 한국인과 프랑스인의 차이에 대해 묻는다면 난 ‘은퇴’에 대한 관점 차이라고 대답할 것 같다.




한국 사회에서 은퇴는 큰 공허함을 준다. 한국사람들에게 은퇴란 쓸모 있는 사회의 일원에서 더 이상 필요 없는 사람이 되는 순간이다. 유용성 없는 쓸모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 이건 정말 참기 힘든 일이다.




그래서 특히 남성들이 은퇴 이후의 삶을 참기 힘들어한다. 자신보다는 가족을 위해 본인을 갈아 넣어 회사에 충성했고, 그걸 가족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퇴직을 하는 순간 가족들과 이미 멀어져 사회뿐 아니라 가정에서조차 설자리가 없어지게 된다.




어떻게 보면 갑자기 너무 많은 ‘쉼’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퇴직 이후 우울증을 호소하는 사람 중 남성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퇴직 후 일을 하지 않아도 살아갈 정도로 돈이 주어진다고 가정하더라도 쉬어 본 적 없는 사람이 쉰다는 것, 사회에서 역할이 없어진다는 것은 여전히 인간을 우울하게 만든다. 왜 그럴까? 유럽에서 은퇴를 대하는 자세를 보면 답이 조금은 할 수 있을 듯하다.




2008년부터 프랑스에 거주하며 본 흥미로운 점은 프랑스인은 은퇴만 바라보고 평생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처음 은퇴 시위를 봤을 때 놀랐던 기억이 있다. 2010년, 프랑스 연금개혁 발표가 있었는데 요지는 정년을 만 60세에서 62세로 연장한다는 것이다.




시위는 은퇴 연장 안에 반대하는 시위였다. 기차는 운행을 중단했고 어떤 대중교통도 다니지 않았다. 당시 주말에 기차를 타고 멀리 사는 친구 집에 가는 길에 환승을 해야 했었는데 기차가 취소되어 처음 와보는 도시에서 밤 10시까지 울면서 기다렸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 같은 외국인을 제외한 그 어떤 프랑스인도 거기에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다.




이유는 하나였다. 이 시위는 우리 프랑스인을 위한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었다. 이 이야기를 한국인들에게 하면 열이면 열, 일 더 하면 좋은 거 아니냐는 말이 했다. 하지만 프랑스인들에게는 60세에 가질 쉼의 시간이 62세로 밀리는 건 한국인들에게는 빠른 퇴직의 공포와 충격과 맞먹는 것이었다.




어떻게 두 나라는 이렇게 다른 쉼에 관한 인식이 있을까?

첫 번째 이유는, 프랑스 사람들은 ‘쉼’을 충분히 경험해 봤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법정 휴가는 연간 25일이고, 주당 근무 시간은 35시간이다. 하루에 7시간 일하는 삶 속에서 남성과 여성 모두 가사와 육아를 함께 한다. 밤늦은 회식 대신 가족과 저녁을 보내는 문화가 자연스럽고, 집은 쉼의 공간으로 작동한다.




두 번째 이유는, 프랑스 사회는 예술과 인문학이 일상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는 점이다. 프랑스라는 나라는 인문학과 예술이 강한 나라이다. 프랑스의 수능시험인 바칼로레아에는 철학 과목이 있으며 수험자는 주어진 철학적인 질문에 대해 에세이를 써야 한다.




또한 프랑스의 예술은 역사적으로 유명했고, 19세기말 인상파 이후로는 미술 하면 프랑스라는 인식이 있을 정도로 강했다. 마지막으로 (비슷한 맥락이긴 하지만) 작은 소도시 곳곳에 박물관과 미술관이 있고, 연극 극장이 있고, 축제가 있다.




프랑스에서 축제는 단순한 먹거리, 볼거리 축제가 아니다. 예술과 함께 먹거리가 어울리는 볼거리 먹거리가 있는 형태이다. 이런 축제가 작은 도시 혹은 마을에도 있다.




한국의 경우 큰 도시의 위성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중심 도시에서만 영화제, 연극제, 미술제등 큰 페스티벌 같은 볼거리를 즐길 수 있다. 하지만 파리를 예로 들자면, 지하철로 연결되어 있는, 우리가 소위 말하는 파리의 위성도시들이라고 하는 작은 도시들도 축제를 한다.





그리고 어디서 알았는지 정말 많은 사람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다.


단순히 축제를 즐기기 위해서이다. 이런 소도시의 축제는 소도시와 소도시가 속해있는 지역(한국으로 치면 경상남도, 전라남도 등)이 보통 주관하고 후원하는데, 이는 축제를 하나의 문화 공공제, 문화 복지라고 생각하며, 여유가 없는 사람들도 충분히 예술과 문화를 볼 수 있도록 하는 걸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문화의 밑바탕이 된다.




요컨대 프랑스인들은 공공 교육 덕분에 자연스럽게 인문학에 노출이 되고, 노동법 덕분에 일을 하고 나서 충분히 쉴 수 있으며, 예술 정책 덕분에 가난하더라도 예술을 즐길 수 있다. 즉, 프랑스인에게 쉼은 삶의 일부를 이룬다.




사실, 축제에 참여하거나 예술을 즐긴다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다. 그 안에는 어떤 콘텐츠가 있으며 가끔은 우리를 향한 가르침이 있기도 하다. 단순히 웃고 넘길 수 있는 것만 있지는 않다. 때로는 여운을 주고 때로는 얼굴을 화끈거리게 하며, 때로는 인상을 찌푸리게도 한다.




이런 콘텐츠는 조용하지 않고 시끄럽다. 단순히 말로 하는 게 아니라 고요함을 가장한다고 하더라도 외침이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야기하며, 누군가는 이야기를 듣고, 타인의 삶을 엿보고, 그를 통해 자기 삶을 돌아보기도 한다.




인문학, 예술, 축제를 잘 즐기려면 너무 피곤하면 안 된다. 이런 걸 즐기면서 쉬는 것도 사실 피곤한 일이며, 자발적으로 이런 피곤한 일을 하려면 나 스스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아무리 유익하고 즐거운 대화도 졸음 앞에서는 무의미하며, 신체적, 정신적 피곤은 잠 말고는 어떤 쉼도 해소할 수 없다.




오죽하면 어떤 철학자는 자기가 자기를 찾기 위해서는 잠이 필수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 축제로 점철된 삶은 프랑스인들이 얼마나 여유롭게 사는 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평소에도 잘 쉬어봤던 프랑스인들은 은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유럽 여기저기의 미술관이나 축제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사람들은 프랑스 배낭부대 할머니, 할아버지이다. 이 배낭 부대는 도슨트를 졸졸 따라다니며, 질문하고, 토론한다.




전공자의 입장에서 이들의 대화를 훔쳐 들으면 예술이나 인문학을 전공한 사람들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러면 어떠한가. 예술과 인문학은 전문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고 글을 쓰는 사람만 필요한 게 아니다. 그걸 감상하고 읽을 수 있는 관객과 독자도 필요하다. 이렇게 프랑스인들이 가지는 노년의 쉼의 태도로 그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젊은 시절을 보냈으며 얼마나 노년의 쉼을 알차게 보내는 지를 볼 수 있다.




이것과 연결되는 프랑스인들의 특징이 또 하나 있는데 다른 사람이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다면, 굳이 그의 생각이 틀렸다고 해서 비난하지 않는 것이다. 예전에 홍세화 씨가 소개한 ‘톨레랑스’의 가치가 프랑스인들의 삶에 깊이 새겨있다.




아마 이것 또한 예술, 인문학의 영향이 클 것이다. 이러한 가치 덕분에 프랑스인들은 예술 작업을 볼 때 본인만의 해석을 숨기지 않고 이야기하며, 철학 교수 앞에서도 스스럼없이 자기가 읽은 철학자의 사상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많은 철학적, 예술적 담론이 있는 프랑스 사회의 관객들은 본인의 역할을 정확히 알고 있다. 그들은 관객으로서 자신의 자리를 찾고 아티스트에게 끌려 다니지 않는다. 내가 느낀 건 내가 느낀 거다.




한국의 노년층은 이런 삶의 쉼을 받아들이기엔 준비가 덜 된 것 같다. 은퇴를 맞이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부단히 노력했던 과거에 대한 보상으로 다가오는 거대한 쉼이라고 하는 공백을 이겨내기 힘들어한다. 은퇴가 다가오면 빠르게 다음 삶을 준비하기 바쁘다.


‘어떤 사업을 할까?’, ‘은퇴 이후에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어떻게 해서 사회 안에서 쓸모 있는 하나의 부품으로 살아갈까?’ 준비한다.




어렸을 때부터 쉼을 연습해야 한다. 쉬는 것도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갑자기 하려고 못한다. 뭐부터 해야 하지, 어떤 걸 해야 하지 생각하다 보면 다시 스마트폰으로 손이 가고, 우리는 다시 15초 영상의 늪에 빠진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잘 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마음을 건강하게 하고, 존재의 이유를 회복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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