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의 인간성: ‘멈출 수 있음’의 철학

정보 과잉 시대, 쉼이 만들어내는 직관과 창조

by 발가락꽃





AI는 쉼 없이 작동한다. 입력이 들어오면 계산하고, 명령이 주어지면 반응한다. 피로도 없고 감정도 없다. 그러나 인간은 다르다. 인간은 ‘멈출 수 있는 존재’다. 인간은 단순히 기계보다 느리기 때문에 비효율적인 존재가 아니라, 멈춤 속에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다시 전진할 수 있는 존재이다. 어쩌면 인간성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인간은 AI처럼 바로바로 응답할 수 없다. 즉 인간은 즉각 어떤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아낼 수 없다. 즉시 해답을 찾는다면 그건 해답이라기보다는 즉각적인 반응에 가깝다. 인간은 정보를 소화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서로 다른 성격의 문제를 동일하게 처리하고, 그래서 동일하게 응답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다.




멈춤의 시간이 없기에 매너리즘에 빠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인간은 무언 가를 읽은 후, 읽은 내용을 되새김하며 그걸 토대로 어떤 상황에 대한 해법을 거기에서 도출해 내기도 하고, 이를 바탕으로 더 창의적인 생각들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받아들인 정보를 소화하는 시간, 그걸 밖으로 내보내는 데 걸리는 시간, 이 시차가 쉼의 기원이다. 즉, 입력과 출력의 시간차이가 자유로운 행위의 원동력이며 이 ‘차이’가 모든 창조적인 발상/행위의 기원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최근 SNL의 90년대 풍자를 보면 우리가 얼마나 다른 삶을 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옛날 사람들 보다 지금 사람들은 긴 시간 근무를 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그리고 이런 성향은 AI시대를 맞이하여 점점 더 많은 쉼으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어떻게 쉬고 있을까? 실시간으로 갱신되는 피드, 계속되는 재미있는 밈들, 하루 종일 업데이트 되는 ‘알지 못하지만 아는 사람’의 소식들을 보며 사람들이 쉬는 듯 보이지만, 실은 끊임없이 피로하다. AI가 일자리를 빠르게 대체하면서 생겨날 ‘쉼’은 능동적 선택이 아니라 강제된 멈춤이 될 것이며, 잘 쉬는 것을 배우지 못한 우리는 24시간 주변과 연결되어 있고,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반강제적으로 계속된 정보를 받아들이기만 하게 될 것 같다.





하지만 언급했듯, 인간은 정보를 소화해야만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존재다. 사람도 AI처럼 즉각 반응하며 데이터를 바로 처리할 수도 있지만, 한 데이터를 오래 간직하기 위해서는 데이터를 숙고하고 여운을 느끼는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정보는 풍요로운데, 감정은 가난한’ 시대에 살고 있다. 생각보다도 더 많은 이들이 감정의 피로와 사유의 결핍을 호소하고 있다. 빠르게 바뀌는 영상, 빠르게 소비되는 지식, 빠르게 사라지는 관계 등, 정보는 넘쳐나지만 감정은 얕다. 머릿속은 수많은 정보로 가득하지만 그만큼 마음은 비어만 간다.




요컨대, 머리는 피로하고, 가슴은 지쳤다. 우리는 지금 ‘정신의 과식’과 ‘영혼의 기아’라는 기묘한 이중 상태 속에 있다.




이런 우리의 결핍을 채워 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사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정보도 아니며 더 빠른 처리 속도도 아니다.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한 템포 늦추는 시간, 그걸 통해 자기 자신에게 귀 기울이는 고요이다.




이게 바로 AI가 절대 가질 수 없는 인간만의 능력이다. 또한 이게 우리가 기계보다 뒤처지지 않는 이유이자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는 이유이다. 좋은 쉼이란 단순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자기 안을 정리하고 사유하며 자신과 다시 연결되는 시간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 존재에 대한 조용한 확인이다.




김붕년 서울대 의대 교수는 한 유튜브 강의에서 쉼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무언가 창의적인 것을 만들어내거나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때 가장 많이 쓰는 기능은 직관이며, 직관은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찾아온다고 한다. 즉 주변 자극을 차단함으로써, 혹은 쉬면서 직관 기능이 활성화된다는 것이다.



김교수는 화학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 벤젠고리의 발견은 케쿨레(Friedrich Kekulé von Stradonitz)라는 화학자가 꿈을 꾸다가 영감 덕분에 가능했다고 예를 들었다.




작곡가 윤종신도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곡 의뢰가 들어오면 아무 일도 손에 안 잡히고, 한 달이면 한 달, 두 달이면 두 달, 다른 음악도 듣지 않고 계속 다른 일들을 한다고 한다.




그러다가 마감 시간을 며칠 남기고는 악상이 떠올라 음악을 만든다는 것이다. 김붕년 교수는 이런 아무것도 안 하는 상태, 그렇지만 직관 기능을 활성화시키는 상태를 쉼과 고독으로 나눴다. 하지만 난 고독 또한 정신적 쉼의 한 형태라고 생각한다.




크게 보자면 쉼을 크게 육체적 쉼, 정신적 쉼으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육체적 쉼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이며, 정신적 쉼은 나를 돌아볼 수 있게 만드는 쉼이다.



다시 말하면 직관 기능은 정신적 쉼에서 더 잘 활성화된다는 이야기이다. 쫓아가기 바쁜 정보사회에서 벗어나, 즉 단순히 정보를 처리하는 게 아니라 정보를 이해하고 나를 바라보는 정보 소화의 시간이 바로 정신적 쉼이다.




김붕년 교수는 같은 강의에서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고 말하고 다니지만, 왜 보호해야 하는지 자문하고, 스스로 그에 대한 답을 찾으면서 우리가 자연의 일부라는 순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독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즉 이런 시간을 통해서만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들을 곱씹어보고, 이해하며, 흡수해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무언가를 소화를 하는 정신적인 쉼은 우리의 삶을 스스로 만들 수 있는, 창조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철학자 베르그송은 인간의 이런 능력을 ‘창조적 진화’라는 말로 표현을 했다. 그에 따르면 예술가는 자신이 경험했던 걸 소화한 후, 소화된 모든 걸 토대로 신선한 시각,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자신이 소화하는 능력과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능력은 다른 능력이 아니라는 점이다.




베르그송은 진화의 정점에 있는 인간이 가진 이런 창조적 능력을 토대로 다시 한번 진화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 유명한 니체의 초인은 자기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게 바로 쉼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쉼은 의미 없는 쉼이 아니라, 일률적이고 단순 반복적인 삶을 뛰어넘어 AI는 할 수 없는, 우리의 삶을 스스로 바꿀 수 있게 하는 그런 쉼이다. 이런 의미에서 쉼은 창조이자 혁신이다. 인문학은 정신의 쉼, 자연 속에서 나의 위치를 직관하고, 나를 돌아봄에 있어서 함께할 길잡이이다. 인문학은 인류의 사상사이며, 삶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스스로에 대해 고민이 있거나 사회 안에서 본인의 모습에 대해 회의가 느껴질 때, 마음이 버겁거나 지칠 때, 자신에 대한 확신이 떨어질 때 사람들은 철학자나 심리학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거나,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면 종교인을 찾아가기도 한다. 아니면 존경할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명언을 들으며 스스로를 다지기도 한다. 왜 우리는 이런 것들이 필요할까?




언제나 시대는 변화하고, 사람들은 각 세대의 특징에 따라 한 세대를 별칭 지어 부르기도 하며, 때로는 세대가 바뀌어 서로가 서로를 이해를 못 하겠다고 불평하기도 한다.




때로는 앞 세대, 혹은 그 보다 전 세대의 이야기와 생각을 듣고 이해하고 공감하면서 위로를 받기도 한다. 삶의 형태, 노동의 형태는 크게 달라졌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서, 마음은 크게 변하지 않았으며 우리의 육체와 같이 우리의 정신도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전히 노동을 하고, 쉬고, 수면을 취하며, 맛있는 음식을 찾고, 가족, 친구, 주변인들과 소통하며 살아간다. 우리의 삶은 수많은 쉼으로 가득 차 있다.




결국 인간은 멈추는 법을 아는 존재이다. 멈춤은 약점이 아니라, 삶을 다시 빚어내는 시작점이다. 당신은 마지막으로 스스로를 조용히 바라본 게 언제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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