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와 문재인 정부를 지나오면서 우리 사회는 2030 남성(이하 이대남) 현상에 집중해 왔다. 그들은 누구인지 또, 그들이 혐오주의적이고 비상식적인 공정담론에 매료된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하려고 애써왔다. 그러다 12 3 윤석열 내란 사태 이후에 벌어진 서부지법 폭동을 통해 그들의 정체가 '파시즘 집단'으로 명명하게 되었다. 그들의 보수성은 연령에 따른 보수성과는 다른 경향을 가지는데, 이는 반진보 사상 내지 반공 정서가 아니라 안티페미니즘을 보수성의 근거로 삼고 있다. 안티페미니즘과 반진보, 반공이 연결될 수 있는 지점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이론적 기반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반대를 위한 반대라는 것이다. 이는 결국 변화에 대한 거부를 의미하게 되는데, 이것이 심화되고 혐오를 가지게 되면 결국 파시즘이 되는 것이다.
필자는 이대남 당사자로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아온 이대남임과 동시에 그 문화에서 잘 어울리지 못한 일종의 아웃사이더로서 이대남들과 마주하면서 그들이 파시즘적 사고방식을 주고받는 주요한 방식인 '또래 집단 문화'에 집중하게 되었다. 청소년기는 성장과정에서 친구의 존재가 중요해지는 시기임과 동시에 사회화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사회와 연결되는 기회가 많은 여성과는 달리 청소년기 남성들은 남성 중심적 관계를 조직하게 된다. 문제는 이곳에서부터 발생한다. 물이 고이고 고이면 썩듯이 그들의 사회성도 썩은 채로 전유되고 이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 폐쇄적 집단의 압력을 견딜 수가 없게 된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안티페미니즘'이라는 담론을 체화시키지 않으면 또래 남성관계를 유지할 수 없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남성들이 주로 향유하는 문화인 온라인 게임에서 이러한 사고들은 강화되게 된다. 그리고 이 온라인 게임은 결국 온라인 커뮤니티에 영향을 받는데 이런 과정을 거쳐 한국 청소년 남성들이 안티페미니즘을 이론적 기반으로 한 파시즘적 성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면 결국 '폐쇄적 집단' 내에서 전유되는 일정한 담론의 형성을 제한하여야 하고, 이 제한의 교육의 자리에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것은 그들이 안티페미니즘을 신념화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혐오범죄로 이어지는 것 같이 보이는데, 최근 강간 피해 사건에서 20대 점유율이 크게 늘어나는 것을 예시로 들 수 있다. 더욱 문제가 되는 상황은 이를 정치의 영역에서 이용하는 것인데, 이를테면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라는 윤석열이나 이준석, 오세훈을 예시로 들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성차별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구성될 수 없으며, 이것이 다른 소수자에게까지 이어지게 된다. 혐오는 한 곳에만 뻗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이 과정에서 이대남들은 그들 스스로의 방어논리를 능력주의에 기반한 공정담론으로 삼게 되고 이에 대한 과정을 불평등에 대한 정당화 논리에 도달하게 된다.
결국 이대남들의 해체는 그들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깨야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의 가장 난해한 문제는 폐쇄적 집단의 해체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폐쇄 집단의 이탈자가 나와야 하는데, 이것은 현재 광장에서 발화되고 있는 '직접 나와서' 증명하라는 말과 일맥상통해 보인다. 결국 그들을 절벽 끝으로 몰아서 포위하고 혐오에 끝까지 저항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