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안전 책임사회]
언젠가 한 일간지 기자로부터 서울 시내에 있는 영화관과 산후조리원 몇 개를 골라 동행해서 취재하자는 제안을 받은 적이 있었다. 경험상 상당수의 규정 위반사항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고 혹시라도 잘못 말하면 관할 소방서의 관계자들이 업무를 태만히 했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어 사무실 일정을 핑계로 어렵다고 둘러댔다.
기자에게 관련 분야의 교수님들을 섭외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역제안했으나 이미 여러 명이 거절을 한 상태라 취재를 진행하는 것에 어려움이 많다는 하소연을 해온다. 솔직히 사무실에 앉아서 폼 잡고 인터뷰하는 자리가 아니라 자칫하면 욕을 먹을 수도 있겠다는 판단을 모두가 한 탓이었다.
그날 저녁 잠자리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오랜 시간 소방 분야에서 몸 담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이야기했던 사람으로서 왜 나는 이런 제안을 거절했을까? 단순히 촬영을 위해 하루 휴가를 내고 사무실을 비우는 일이 번거롭다거나, 아니면 출연료를 받는 일이 아니라서 거절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내가 말했던 안전의 참모습이라는 것이 결국 나의 유불리에 따라 적용되는 <선택적 규정>이었단 말인가? 갑자기 나 자신에 대해 실망스러웠다.
다음 날 아침 일찍 기자에게 전화했다. 취재 당일에 휴가를 낼 테니 함께 하자고 전했다. 그리고는 약속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 일찍 만날 장소로 지정된 대형 멀티플렉스 극장에 혼자서 먼저 올라갔다. 사전에 말을 맞춘 약속된 세팅이 아닌 진짜 모습을 보기 위해서였다.
보통 카메라를 동반하는 취재의 경우 사전에 방문 협의를 했을 것이다. 그래야 관계자의 적극적인 협조를 얻어 촬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시간 먼저 방문한 극장은 나의 예상과 다르지 않게 겉으로 봐서 문제가 될 만한 것들을 하나하나 고치고 있었다. 만약 촬영이 오지 않았다면 그대로 방치되었을 것들을...
다행히 관할 소방서와 극장 관계자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문제가 된 점들은 바로 현장에서 바로 잡을 수 있었다.
우리 사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안전 전문가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정부 각 부처별로 안전을 담당하고 있는 공무원들의 숫자도 적지 않다.
하지만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2003년 대구지하철 방화사고, 2014년 세월호 참사, 그리고 2022년 이태원 참사 등 대형사고를 경험하면서 과연 안전 전문가 집단과 관련 공무원들의 역할이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재난이 발생하면 너나 할 것 없이 "진작에 이렇게 했었어야 했다..." 라거나 혹은 "또 저렇게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라며 모범 답안을 제시하기에 바쁘지만, 왜 그런 지혜와 지식 그리고 선견지명을 재난이 발생되기 이전에 그들은 목소리 높여 말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이미 말했지만 정부가 귀를 기울이지 않은 까닭일까?
이미 벌어진 일에 의견을 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대단히 무책임한 일이다. 적어도 안전 전문가나 안전을 담당하고 있는 공무원들에게는 우리 주변의 위험요소들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고 제거하기 위한 실천이 요구된다.
특히 대한민국 공무원이라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위험을 제거하려는 정책적 실천을 적극적으로 실행해야 하지만 상명하복식의 경직된 조직문화와 혹시 내가 책임을 지지 않을까 하는 보신주의는 위험요소를 제거하는 절차적 어려움만 가중시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어느 한 분야의 학력과 경력 그리고 자격증을 갖춘 사람을 우리는 전문가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런 외형적인 스펙 이외에도 자신이 치열하게 공부했던 것들을 현장에서 양보하지 않고 실천하려는 의지와 프로 정신까지 갖춰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의 전문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어설프게 흉내만 내지 말고, 또 현장에서 융통성이라는 이름으로 섣불리 타협하지 말고 그 이름의 무게감에 걸맞게 행동해야 할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