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회 캄보디아 동남아시아 경기대회] D-4
캄보디아 파견 도핑검사관으로 선발되었다는 연락을 받고는 베란다 한편에 고이 모셔두었던 캐리어를 꺼냈다. 일 년에 한두 번씩 짐을 싸고 또 풀다 보니 이제는 나만의 스타일이란 것이 생겼다. 짐을 챙길 때의 포인트는 생활하는 공간은 바뀌어도 내 하루의 루틴에 영향이 없도록 항목을 구성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틀에 한 번씩은 조깅을 해야 하니 운동복과 러닝화는 필수고 매일 써야 하는 플래너는 반드시 넣어야 한다. 원활한 업무수행을 위해 영문 도핑검사 매뉴얼은 미리 출력해서 지참하고 상황에 따라서는 햇반이나 라면 등 충분한 양의 간식과 멀티포트를 챙겨야 할 때도 있다.
원활한 사전 준비를 위해서는 우선 현지에서 체류할 숙소의 여건을 확인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래야 짐의 규모를 정하기가 수월하기 때문이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해당 호텔에서는 어떤 서비스가 제공되는지, 그리고 숙소 주변의 마트나 맛집 정보 등을 알면 굳이 부피가 큰 간식이나 불필요한 항목들을 가져갈 필요가 없어진다.
하지만 당장 내일모레가 출국인데도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 파견을 담당하는 직원이 캄보디아에 수 차례 메일을 보냈다고 했지만 여전히 감감무소식이다. 현재까지 결정된 것이라고는 대회 기간 동안 착용할 티셔츠 디자인과 공항에 누가 마중 나올지 정도만 알 수 있을 뿐 숙소나 이동수단, 그리고 제일 중요한 근무 스케줄 등은 아직 미정이다.
동남아시아에서의 도핑검사 여건은 우리나라 상황에 비해 그리 여유롭지 못한 편이다. 인력, 예산 그리고 시설 등 모든 면에서 우리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 그래서 지난해 베트남 하노이 동남아시아 경기대회에서는 한국도핑방지위원회가 주축이 되어 베트남 도핑방지위원회를 지원해 주었다. 검사관을 파견하고 검사계획 수립과 신규 도핑검사관 교육까지 전방위에서 넉넉하게 관여한 덕분에 대회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참고로 한국도핑방지위원회는 대한민국 유일의 스포츠 도핑방지 전담 국가기구로서 2006년 11월에 설립되었으며 현재는 세계도핑방지기구(WADA) 아시아지역 이사국으로 선임되어 세계도핑방지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번 캄보디아 대회는 일본도핑방지위원회가 지원하고 있다. 굳이 스포츠라는 영역에서 정치를 논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일본 사람들 특유의 선을 넘지 않으려는 예절과 조심성이 대회 준비를 속도감 있게 진행하는데 장애가 되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진단해 본다.
상황을 종합해 보면 대회 조직위원회에서 도핑관리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캄보디아 직원들의 고민이 매우 클 것이라는 점은 불을 보듯 뻔하다. 수 백명의 도핑검사관이 동원되는 올림픽의 도핑관리 업무도 결국 그 나라의 경제력과 비례한다는 냉혹한 현실과 직면하게 된다.
이번에 처음으로 멀티 스포츠대회를 준비하고 있는 캄보디아. 오랜 침묵 속 그들의 고민은 과연 어떤 방향으로 해결될 수 있을까? 곧 응답해 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