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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움과 비움

[제32회 캄보디아 동남아시아 경기대회] Day 1

by 이건

5월 프놈펜의 낮 기온은 38도. 게다가 높은 습도는 사람을 빨리 지치게 만든다. 마치 한국의 8월을 앞당겨서 연습하는 듯 무더움의 연속이다.


오늘 한국의 어린이날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고 했다. 이젠 중학생과 고등학생이 되어 버린 아이들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빠로서 아이들과 함께 하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이 크다. 물론 귀국하면 후불 정산해야 한다.


아침 9시 호텔 로비. 국제 도핑검사관들에게 새로운 미션이 하달됐다. 종목별로 경기장을 방문해 도핑관리실 준비상태가 어떤지를 점검하는 임무였는데 예상대로 대부분의 경기장에서 많은 문제점들이 접수되기 시작했다.


특히 체조와 역도의 경우에는 외부에 텐트로 제작된 도핑관리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나마 천막 안에 에어컨이 있긴 했지만 이 뜨거운 날씨에 얼마나 버텨줄 수 있을지 염려스럽다.


도핑관리실의 주된 체크 포인트는 선수 및 도핑검사관의 보건과 안전이 확보될 수 있는지, 선수의 프라이버시가 보호될 수 있도록 장소가 선정되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료가 완전하게 처리되고 보관될 수 있는지 등을 확인하는 것이 관건이다.


텅 빈 도핑관리실에 채워야 할 것들이 많아지면서 오히려 검사관들의 마음은 부정적인 생각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런 마음을 비우자고 다짐해 보아도 채움의 속도를 이길 수는 없었다.


돌이켜보면 지난해 하노이에서도 빈 공간이 제법 많았었다. 한국에서의 도핑관리 업무에 익숙했던 나는 그제야 비로소 우리나라의 수준이 얼마나 세계적인 것이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하노이 대회보다 훨씬 더 미흡한 준비상태를 보면서 캄보디아가 왜 이렇게 큰 대회를 준비하면서 추진력에서는 최고인 한국을 선택하지 않고 일본의 손을 잡았는지 사뭇 궁금해졌다.


스포츠에서 무슨 국적을 논하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모든 대회는 인력과 예산, 시스템과 운영의 전문성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므로 결코 소홀히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서류와 지나치게 디테일한 절차를 중요시하는 일본도핑방지위원회의 스타일은 지난 도쿄올림픽에서도 수차례 그 약점을 드러낸 바 있었다. 특히 현장과 동떨어진 정책들은 무서울 정도로 현장 추진력과 융통성이 좋은 한국과는 대조되었다.


이번 대회를 시작하면서 나는 이미 마음을 비웠고 그 빈 공간은 지난 시간 체득한 내 경험을 이곳 사람들과 공유하고 캄보디아에 대한 이해와 배려로 채워나가기로 했다.


이번 대회의 모토인 "Sports: Live in Peace"처럼 너무 전투적으로만 하려고 하지 말고 이곳 사람들과 같이 평화롭게 살아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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