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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 Dec 19. 2023

회식의 역학

[소방서 다이어리]

Prologue: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을 가감 없이 적어 보려고 합니다. 부디 이 글로 인해 누군가 상처받지 않길 바라며 소통을 통해 내 작은 세상도 더 풍성해 지길 기도해 봅니다.


이번 주 금요일 미군들과 함께 조촐한 회식을 하기로 약속했다. 소방서의 미군들과 마지막으로 회식을 한 지는 아마도 일 년이 조금 넘었을 것이다. 메뉴는 양꼬치에 소맥으로 정해졌으니 이제 좋은 추억만 만들면 된다.


다음 달 한국을 떠나는 친구 Coulter는 이곳 오산 공군기지 화재예방팀에서 나와 두 번이나 같이 근무한 경력이 있다. 이번에 한국을 떠나면 아마도 다시 한국을 방문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와의 소중한 기억과 함께 근무한 것에 대한 감사함이 나로 하여금 이번 회식을 주도하게 만들었다.


사실 몇 년 전부터 미국 사람들과 함께 하는 회식을 자제해 왔다. 이젠 익숙할 법한 그들의 문화가 여전히 낯설고, 또 제대로 된 영어를 구사해야 한다는 강박감 때문이었는지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고 귀가한 날도 제법 된다.  


지난 18년 동안 무수히 많은 미국사람들과 술을 마셨다. 웃고 울고 미칠 듯이 떠들던 시간들이 어쩌면 지금의 나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술을 많이 마시기로 소문난 소방관들의 회식은 술만 마시는 자리는 아니다. 술을 마시면서 누군가의 포부를 확인하기도 하고, 혹시 욕심이 지나치게 많은 사람은 아닌지, 우리 사무실에 어울린 만한 사람인지 등도 파악한다. 누가 회식 자리에 늦었는지, 혹은 생각보다 술이 약해 비틀거리기라도 하면 내 기대감은 곧 실망으로 바뀐다.


미군들과의 회식 자리 또한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어설픈 군대 문화와 군기를 확인하고, 누가 배짱이 두둑한 마초인지, 누가 우리를 즐겁게 해 주는지도 파악할 수 있으며 때론 은밀한 면접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코로나로 인해 모이는 것이 권장되지 않았던 지난 3년은 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모처럼의 안식년이 되었을 것이다.


회식이 의무가 아닌 이곳 주한미군에서는 참석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가끔 드는 생각은 만약 누군가가 보여줄 것이 별로 없거나, 술을 좋아하지 않거나, 혹은 평상시 주변의 지인들로부터 “너는 분위기 파악을 잘 못한다”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면 가급적 회식 자리는 피하는 편이 좋다.


회식이 회식이 아닌 곳에서 또다시 평가를 받는 일은 너무 괴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다들 힘겹게 버티고 사는 세상, 굳이 불편한 자리에서 힘들게 버틸 일도 아니다. 돈, 건강, 감정까지 낭비하면서 이중으로 삶의 고충을 확인할 일은 더더욱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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