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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 Mar 29. 2020

불완전함에 대한 관대함

보스턴의 기억

보스턴의 기억

보스턴의 기억 

2011년 미국 보스턴. 소방관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가보고 싶어 하는 소방 엑스포에 출장을 가게 되었다. 규모나 내용면에서 자타공인 세계 최고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오랜 시간 동경해 왔던 곳이기도 하다.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또 확인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출장 승인이 떨어진 날, 나는 내 오른손을 꽉 움켜쥐고 "Yes"라고 외쳤던 기억이 난다.  


사실 출장이 성사되기까지 여러 사람을 만나 설득해야 했고 또 고집도 부렸다. 사람 살리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이번만큼은 그 고민들을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며 "Please"를 연신 남발했고 그렇게 미국길에 올랐다. 


보스턴은 매사추세츠주의 주도로 영국에서 최초로 독립한 도시다. 


미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문화, 그리고 하버드, MIT, 그리고 가수 싸이가 다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버클리 음대 등이 있는 교육의 도시이며, 세계에서 가장 전통 깊은 마라톤 대회인 보스턴 마라톤의 개최지이기도 하다.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면 버클리 음대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버드 대학교 안에 있는 캠브릿지 소방서. 미국 소방서 최고 등급인 1등급 소방서 중 하나다.


첫날은 보스턴을 돌아보기로 했다. 언제 또 올지 모른다며, 또 평생 기억하고 싶다며 괜히 건물 이곳저곳을 손으로 만져도 보고, 멍하니 바라도 보고, Made in USA 공기와 바람도 흠뻑 들이마신다. 촌놈처럼...  


그렇게 보스턴과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둘째 날부터는 소방 엑스포 기간 내내 보스턴 컨벤션센터에서 시간을 보냈다. 역시 클래스가 남다르다. 150여 개의 안전 관련 세미나가 건물 전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열리고 지하에는 축구장 몇 배나 됨직한 공간을 수많은 소방장비들로 채워 놓았다.   


더욱 감동스러운 것은 늘 책으로만 보았던 미국의 기관들, 예를 들면 OSHA, USFA, NIOSH, IAFF, IAFC, FEMA, DOT 등에서 온 관계자들과 만나 그동안 궁금했던 것들에 대해 원 없이 물어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불완전함을 징계로 해결하지 마라. 

여러 세미나 중 마음에 드는 하나를 골라 자리에 앉는다. 참석자 대다수가 소방관인데도 세미나를 시작하기 전 비상시 전화번호가 911이라는 점과 비상구가 어디인지도 소개해 준다. 역시 마음에 든다. 


우리나라 국회나 정부종합청사에서 진행하는 안전 세미나를 수차례 가 보았지만 비상구 안내 같은 것은 없다. 그냥 스스로 알아서 챙겨야 한다. 그런 기본이 무시되어 무수히 많은 대형사고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안전을 운에 맡기고 있다.  



그렇게 2시간 가까이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고 간뒤 질문과 답변의 시간이 돌아왔다. 무슨 용기였을까? 번쩍 손을 들고 한국에서 왔다고 말한 뒤, 혹시 소방관이 소방검사를 잘못해서 징계를 받기도 하는지 물었다.


모두가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내가 이상한 놈이 되어 버렸다. 


"소방관도 사람인데 실수를 할 수는 있다. 또 그에 따른 면책조항도 있다. 불완전함에 대해 징계를 주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는 답변을 받고 서둘러 자리를 피한다. 강의실을 나오면서 문득 "아, 일본에서 왔다고 말할걸 그랬나?" 한편으로는 창피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소방관의 업무를 잘 이해하고 있는 그네들의 시스템이 너무 부러웠다.   


우리나라는 큰 불이 나면 제일 먼저 소방서에 책임이 있는지를 따져 묻는다. 방화가 아닌 이상 건물에 대한 모든 문제는 기본적으로 건물주나 관계자의 책임일 텐데, 상급기관이나 언론에서는 소방관의 소방검사가 적절했는지, 혹시 부당한 거래가 있지는 않았는지, 또는 왜 위험을 방치했느냐고 하면서 소방관 한 사람에게 책임을 몰아간다. 우리나라에서는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필요하므로...


주한미군에서도 불이 나면 화재 원인을 조사하지만 그렇다고 소방관에게 책임을 전가시키지는 않는다. 원인을 파악하고 대책을 세우면 그만이다. 


보스턴에서의 마지막 날. 하버드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시는 의대 교수님과 맥주 한잔을 하면서 보스턴에서의 소회를 나누었다.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오신 교수님은 유독 소방에 관심이 많은 분이다. 


비행기에 오르면서 마음속에 소중한 선물 보따리를 가득 담았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이곳에서 보고 듣고 깨달은 모든 것들이 평생을 소방관으로 살아가고 싶은 나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 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역시 오길 잘했다. Thank you, Bos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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