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에 떠났던 오래된 글
탄광의 내부를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는데 저 멀리서 어느 아저씨가 나에게 손짓을 했다. 무단 침입한 나는 체념하고 아저씨에게 다가갔다. “사진작가시오?” 예상치 못한 질문에 쳐다본 아저씨의 얼굴은 너무나도 인자해 보였다. “아니요 그냥 취미로..” “그래? 나는 사진협회에 등록되어 있는데, 내가 도계에서 사진관을 하나 하거든” 아저씨는 낮은 간이의자를 내어주면서 앉으라고 손짓하셨다. 한낮의 더위가 처마 그늘에 가리어져 한 줌의 그늘을 내어주었다. 아저씨는 낮에 광부 일을 하시고, 사진관은 사모님이 봐주신다고 하신다. 나도 도계에 온 까닭과 이곳으로 걸음 하게 된 이유를 고백했다. 여기 시골의 사람들이 녹음한 안내방송이 나오는 ‘시골버스’에 대해 말씀드렸다.
“허 그래그래. 좋은 생각이다”
내가 혼자 시골을 돌아다니면서 ‘시골버스’에 대해 이야기를 드리면 모두들 자신들의 사투리로 나지막이 멘트를 해보신다. 모두가 평소에 쓰던 말투와 익숙한 정류장 이름이지만 내가 대놓고 물어보면 부끄러운 듯 잘 모르겠다고 하신다.
“허. 그거 뭐라고 해야 하나”
아저씨도 내심 부끄러우신 듯 웃어 넘기 신다. 순간 아저씨의 표정이 너무 아름다워 보였다.
“선생님 저 사진 한 장만 찍어도 될까요?”
“뭐 볼 게 있다고...그래!”
카메라를 들고 전문 사진작가님 앞에서 셔터를 눌렀다.
“선생님 아무것도 하지 마시고, 지금처럼 그냥 저랑 대화한다고 생각해 주세요”
아저씨와 나 사이에 탄가루들이 반짝거렸다.
아저씨는 광산으로 나는 또 다른 곳으로 향했다. 한걸음 더 들어간 내 발걸음이 스스로 대견했다. 올라올 때 뵙던 어르신들이 아직도 정자에 앉아 아무 말씀도 없이 더위를 곁에 두셨다. 나는 내리쬐는 해를 피해 도계역 앞에 있는 카페를 갈 생각이었다. 찌는듯한 현장에서 일하시는 아버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조금 전 광부 아저씨의 삶과 다르지 않은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면 이 무더위가 덜컥 무서워진다. 아버지에게 전화를 드렸다.
“여보세요 아버지 일하세요?” “일하지” “날이 너무 더워요 좀 쉬면서 일하세요” “그래 언제 오냐” “저 한 이틀 뒤예요” “그래”
부자 지간의 통화는 웬만해선 1분을 넘기기 어렵다. 식사는 하셨는지 집에 도착하셨는지 그 두 가지만 여쭤보고는 말이 쏙 들어가 버린다. 아버지는 건축 현장에서 일을 하신다. 예전에 현장 일을 도와드린 적이 있는데, 8층부터 1층까지 각층에 스무 포대씩 시멘트를 나르는 일을 했다. 한 포대만 올려도 다리가 후들거리고 숨이 턱 막혔다. 몸이 성한 나도 이렇게 힘이 드는데 현장의 아버지들은 묵묵히 포대를 실어 나르고 또 실어 날랐다. 결국 나는 하루 일하고 몸살이 나버렸고, 다음 날 그다음 날도 아버지들은 새벽에 현장으로 출근하셨다.
‘인이 박힌다’라는 말이 '참을 인'자인지 모르겠지만, 몇십 킬로의 포대를 어깨에 짊어지는 까닭은 그것보다 더 무거운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만 해볼 뿐이다. 내가 현장에서 본 아버지들은 언제나 아버지였고, 나는 가끔 아들이었다.
카페에서 시원한 아메리카노를 마시니 해가 중천을 지났다. 약국에 들러 박카스 한 박스를 사고 좀 전에 광부 아저씨가 운영한다는 사진관에 들렀다. 영문을 모르는 사모님이 나오신다. “어쩐 일이세요?” “사진관에 사진 찍으러 왔죠 사장님 계세요?” “아직 안 오셨는데” 능청맞게 농담을 하고 박카스를 드렸다. “아 사실 아까 탄광에 갔다가 아버지 만나 뵙고 이야기를 나눴어요. 오는 길에 인사차 들렀습니다” “아이고. 뭐 이런 걸 사 오고 그래요” 안에서는 따님분이 시원한 보리차를 내어주신다. 앉아서 사진관과 도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태백장 여관’으로 귀가했다. 해는 저만치 멀어졌고 그 공간을 시원한 공기가 메웠다. 오늘은 도계에 계신 아버지에게 말하지 못한 감사의 마음을 박카스로 대신했다.
문이 잠기지 않는 ‘태백장 여관’ 1번 방도 이젠 그러려니 하며 편하게 잘 수 있게 되었다. 내일은 도계를 떠날 참이었다. 다른 곳으로 옮겨서 ‘시골 버스’의 또 다른 후보지를 찾고 싶었다. 여행지로는 쉽게 가지 않을 이 ‘도계’를 나는 꽤 오랫동안 기억할 것 같다.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관광지보다 내 식대로 살아남은 동네가 ‘시골버스’와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과하게 포장할 필요도 없고, 구태여 설명을 붙일 일도 없다. 보여줄 건 사람밖에 남지 않은 곳. 2000년대 초반, 필름 영화에서 내가 느낀 진하지 않은 향기를 머금은 그런 곳들. 다시 떠날 생각을 하니 이틀의 여독이 올라온다. 만난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르고 말들이 스민다. 내일은 할머니와 인사를 나눠야겠다.
<다음 마지막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