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ㄹim Dec 24. 2018

맨발의 슈퍼맨 。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에게도 어릴 적 아버지는 이 세상 최고의 히어로였다.



아버지 손만 닿으면 고장 난 대문이건 자전거건 뚝딱 새것으로 고쳐졌고


여름이면 마당에 키가 높은 평상을 만들어 원두막의 향수도 느끼게 해 주셨으며


남다른 손재주로 심지어는 재봉틀을 돌려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원피스며


멜빵바지도 지어 입혀주곤 하셨다.


어린 나에게 아버지는 슈퍼맨이고 맥가이버였으며 가제트 형사 그 모든 것이었다.




단, 일곱 살이 되던 해 크리스마스이브날 까지는...!





/





바야흐로 때는


1992년 12월 25일 새벽.




'밤에 산타할아버지가 오실텐데. 안 자고 있다가 따뜻한 보리차라도 드리면 좋을텐데 말이지!'




성탄절 이브날 밤이면 엄마가 끓여놓은 따뜻한 보리차를 한 컵 가득 들고 방에 들어와


창틀에 놓았다가. 문 앞에 놓았다가. 머리맡에 놓았다가 하며 전전긍긍 방안을 돌곤 하였다.


일 년 중. 구점 구할을 난봉 어린이로 지내다, 성탄절 며칠 전만 반짝 착한 어린이로 살던 처지였


기에 어떻게든 잘보여 선물자에서 탈락하는 재앙을 막기 위한 일종의 최후의 몸부림이었다.




보리차가 식으면 어쩌나. 창문이 잘 안 열리면 어쩌지.


이런저런 심각한 고민과 걱정으로, 초저녁부터 딥슬립에 빠지기로 유명한


잠순이가 이 날따라 쉬이 잠 못 들고 밤잠을 설쳤던 것.



그렇게 한참을 뒤척이다가 겨우 선잠이 들었는데 귓가에서 '바스락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조금씩 흐려지는 의식을 확. 붙들었다.


이 순간을 놓치면 안 돼! 라고 속으로 외치며 감기는 눈을 부릅 뜨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와 동시에 점점 빠르게 쿵쿵 울리는 심장소리..!



이 소리에 산타할아버지가 당황하셔서 선물 놓는 걸 잊고 서둘러 나가시는건 아닐까. 그 짧은 찰나에


오만 걱정을 하며 바스락 소리가 나는 쪽으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았다.



방 안으로 쏟아지던 달빛 속의 사람 실루엣.




오 마이 갓 정말로 산타할아버지를 보게 되다니!




호기심을 못 참고 좀 더 자세히 보려고 눈에 안간힘을 넣던, 바로 그때였다.



헙!


새어 나오는 신음소리에 스스로 놀라 가슴께의 이불을 휙 끌어당겨 입을 꾸욱 막았다.


쉴 새 없이 쿵쿵이던 심장이. 일순간에 멈추는 것 만 같은 충 격.



하이얀 털이 달린 두툼한 빨간 장화를 신고 있어야 할  산타할아버지는.


장화는 커녕.


볼록 튀어나온 복숭아뼈가 선명히 보이는 맨발 차림.. 이셨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믿고 있던 내 안의 세계가 우르르 무너져 뒤죽박죽 믹스가 되려던 바로 그때였다!

 

다행히도 이 모든 염려를 불식해주는 긍정 천사의 음성이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놀라지 마렴! 이곳은 미국이 아니잖니. 산타할아버지는 예의가 바르셔서


우리나라에서는 우리처럼. 신을 벗고 들어오신 거야!"




아하 그렇지 그렇구나 맞다 맞어!! 역시 그럼 그렇지 휴우..



그제야 비로소 온몸에 긴장이 풀리고 걱정이 사라지며 기쁨이 샘솟으며 멈추었던 심장이


다시 설렘으로 가동. 가동 ..  되는구나.. 싶었는데.  


그만 나는. 발목위로 보이는 반딱 반딱이는, 눈에 익은 폴리에스테르


소재의 실크 바지 한 귀퉁이를 목격하고야 말았다. 하얗고 보드라운 느낌의 반딱이는 소재.


그것은


내 아버지의 잠옷임에 틀림없었다.


그러고 보니 뽈록 튀어나온 복숭아뼈가 어쩐지 낯설지가 않더라니...  





의심하고 싶지만.

  

당신은 산타할아버지임에 틀림없다고.


소리치고 발버둥을 치고만 싶었지만.


너무도 그러고 싶지만 의심의 여지도 없이 머리맡의 산타는



내 아버지임이 분명했다.






아무리 모든 것을 다하는 슈퍼맨이래도, 산타할배까지 아버지일 줄이야....!


당혹스러움과 허탈함 그리고 배신감이라는 어마어마한 감정들이 쓰리콤보로 달려들어


일곱 살 꼬마의 동심을 마구 흔들던 그때.


맨발의 슈퍼맨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불을 홱- 걷어 차고 벌떡 일어나 앉아서는 폭풍우 같은 설움을 토해내며


엉엉 울어야겠다 하고 마음을 먹는데.   


까치발을 한 채 쭈그려 앉아서는 딸내미가 깰까 마음 조리며 조심조심


부직포 양말에 선물을 옮기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 먹은대로 벌떡 일어나 앉을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그냥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리고는 그르렁그르렁 하는 깊은 잠 효과음도 꾸며내기 시작했다. 쩌업-쩌업 하며 입을 다시는


고난도 잠든 척 추임새까지 곁들였다. 어쩐지 그 순간에 잠이 깬 것을,


맨발의 산타를 목격한 것을 들켜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나의 판타지는 끝이 났지만 비록 내 슈퍼맨의 판타지라도 지켜줘야겠다는,


일종의 책임감 같은 것을 느꼈다랄까.


 곤히 자는(!) 딸의 모습에 안심하며 여전히 뒤꿈치를 든 채로


조심조심 걸음을 옮긴 후 미세한 쇳소리라도 날 새라 공들여 천천히 문고리를 돌려 방문을 닫아주던,


그 사려 깊은 손길을 귀로 들으니, 잠든 척 하기를 잘했구나 싶었다.



딸내미가 깰까 봐 수시로 돌아보던 부엉이 눈처럼 까맣고 반짝이던 아버지의 그 눈이 자꾸 생각났다.


그 눈빛을 본 순간. 혼란하게 요동하던 마음 파도가 일순간 잦아드는 것 같았었다. 그리고


뭐랄까 약간 슬프기도 한. 아무튼지간에 무척 낯선 기분이 차올랐다.


천장을 마주하고 바로 누운 채로 이 기분이 무얼까 한참을 고민했지만.


7살의 나는 결국 알아내지 못하고 한참을 천장만 바라보며 눈만 꿈뻑였더랬다.




그때는 어려서. 처음 느껴본 그 기분을 어떻게 표현할지 몰랐지만


지금. 이만치 크고 보니. 그때 그 감정은 아무래도 심장을 지그시 누르는  


짠 -함   이었던 것 같다.





그날 이후로. 꼭 26년이 흘렀다.


산타할아버지를 신봉하던 일곱 살 꼬맹이는 인터내셔널 나이에 집착하는 삼십 대가 되었고


올여름 환갑 생일을 맞이한 우리 집 슈퍼맨은 지난주, 정년퇴임을 하였다.


 

퇴임만 하면 밀린 늦잠도 실컷 자고 느지막이 일어나 여유를 부리다가 또 실컷 잘 거다


하시던 것과는 달리, 수십 년간 몸에 밴 습관 탓에 여전히 이른 아침 일어나 엄마와


아침식사를 나누곤 하신다.



며칠 전. 나갈 채비를 마치고 신발을 신으려 몸을 수그리는데 거실 저쪽에서


어째 많이 낯이 익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햇살이 쏟아지는 거실 창가. 그중 가장 볕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자그마한 라디오에서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트로트 멜로디를 따라 흥얼거리며

 

수리를 미루어 두었던 집안의 작은 소품들을 만지작하며 고칠 궁리를 하는 그 모습이,



26년 전. 달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창가에 앉아 조심조심 선물을 채워 넣던


 그날 밤 젊은 날의 아버지를 불러온 것이다.




직장. 그리고 가정.


안팎으로 절대로 추락해서는 안 되는 슈퍼맨이 되기 위해 쉴 새 없이


이를 악물어야만 했던 세월들.



도저히 견디기 힘든 위기의 순간에도 포기 않고 잘 버티어준


우리 집 슈퍼맨의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예전보다 작고 구부정해진 그 모습이


이 날따라 어쩐지 더 짜-안 하게 다가왔다.





/





쓸데없이 부끄럼만 많아져서는.


직접 말도 못 하고 이렇게 이 공간을 빌어 고백하는 바.



퇴임을 하셨어도.


그대는 우리 집의 영원한 슈퍼맨이라는 것 잊지 마세요.


그리고,



못난 딸이요.


아빠를 많이 사랑합니다.











이전 23화 각별한 순간 。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