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기는 삶
"저 아저씨 하고 인사하기 싫어요. 돈 안 받을래요."
- 6살
덩치는 산만하고, 눈썹은 짙고 손가락이 하나 없었다.
그냥 느낌이 싫어서 도망갔다. 훗날 알게 된 것은, 그 사람은 깡패였다는 것.
똑똑, 딩동-
"아빠 친군데, 문 좀 열어볼래?"
"아빠 안 계세요. 안 계시는데 제가 문 열 필요 없잖아요. 다음에 다시 오세요."
"아 ~ 이런 얘기하기 좀 그래서 안 했는데, 아저씨들 경찰이야. 조사할 게 있어서 그러니까 문 좀 열어줄래?"
"제가 아저씨 누군 줄 알고 문을 열어줘요? 증거 있어요? 영장 있어요?"
- 초등학교 6학년
진짜 경찰이 아니었다. 사채업자 혹은 깡패무리들이 문을 열게 하기 위한 사기일 뿐.
아버지는 한때는 작은 건축회사 사장님이었다. 이외의 다른 사업들도 하셨다. 축하 화환들도 많이 왔다.
하지만, 여러 가지 문제들이 겹치면서 부도가 나고 빚을 지게 되었다고 알고 있다.
아버지 돈을 가지고 외국으로 도망간 사람도 있었고 아버지의 사업은 내리막길을 걸었다.
돈을 빌려줬던 사람들과 그들이 함께 하는 깡패들에게 때때로 쫓기고 종종 위협당했다.
나와 어머니는 가족이기 때문에 때때로, 함께 위기에 빠졌다.
욕 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침을 뱉기도 하고, 밀치기도 했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왜 이렇게 자꾸 불편한 얼굴을 하고, 욕을 하면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은지 제대로 알지는 못했다. 그냥 직감적으로 '별로 좋지 않은 사람들, 경계해야 할 것 같아'라고 느끼고 행동했을 뿐이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어린 내가 무엇인가를 알게 하기는 조심스럽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셔서인지 자세하게 들은 적은 없었다. 커가면서 내가 스스로 알게 되었을 뿐이다.
돈을 달라고 찾아오는 사람들은 당연하지만, 항상 화가 잔뜩 나 있었다.
문을 안 열어주면, 문을 부술 듯이 쿵쾅쿵쾅 끊임없이 내리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욕을 큰소리로 끝도 없이 계속하는 인간들도 있었다.
창피해서 문을 열길 바란건지, 무서워서라도 열길 바라서 그런 건지, 그저 자기 화에 자기가 못 이겼던지.
늘 초조와 불안이 나의 뒤를 망령처럼 따라다녔다. 누가 문이라도 두들기면, 혹은 집을 걸어갈 때 어떤 무리들이 걸어오면, 혹시?라는 생각에 경계태세부터 취하기 일쑤였다.
나이 들수록 점차 덤덤해져서, 그까짓 위협에는 울고불고하지 않기 시작했다. 쿵쿵거림에 대답 없이 바로 112에 신고하곤 했다. 언제까지 출동하겠다는 문자 연락이 오고, 정말로 생각보다 빠른 시간 내에 도착한다.
(애쓰는 경찰분들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친절하게 안부를 물어봐주고, 또 위협하면 바로 연락하라고 안심도 시켜준다.
아버지의 개인회생절차를 알아보고 신청한 적도 있었다.
결혼 준비하는 와중에, 몇백만 원을 급하게 전화로 송금부탁하신 적도 있었다.
10대와 20대 시절에는, 삶은 어쩔 수 없는 일들과 해결 과정의 연속이다. 원망하지 말자와 이건 다 부모탓이야. 원망하고 싶다가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해댔다.
내 마음의 부정적 감정의 컵이 가득 차서 정리하지 못하고 엎어져 버리면, 창피하게도 정해진 경로에서 일탈을 하거나 방황을 했다. 원망하고 싶다가 이기는 것이다.
다양한 일들을 겪으면서, 원망하지 말자가 조금씩 이기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쓸쓸한 어느 날에는 머릿속이 복잡하고 마음이 공허하다. 그래도 예전에 비해서, 마음의 공허함과 공허함을 진실과 사실로 만드는 우매함을 구별할 수 있는 수준은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중이다.
위에서 언급했던 사건들도 10년이 넘어서는 일들이라, 시간이 지나면서는 정말 오죽하면 그러셨을까라는 마음이 먼저 들기에, 밉기보다는 죄송스럽다. 마음 한편이 아리다.
슬픔과 원망의 너머로, 부모님을 바라봤을 내 눈초리가 부모님의 마음에 꽂혔을까 봐 슬프다.
실은, 우리 아버지는 대부분의 상황에서 "괜찮니, 그럴 수 있다. 힘들지."라며 내 마음을 많이 읽어주셨다.
엄마랑 싸워도, 내 몸이 아파도, 입시를 준비해도, 사랑에 실패해도.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미안하다고도 많이 하셨다.
누군가는 책임을 다하지 않고 말로만 포장한다고 비난할지도 모르지만, 아버지의 장례 이후에 상속 포기와 한정 승인을 위해 법무사를 통해 여러 가지를 준비하면서 각종 문서나, 흔적을 통해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최선을 다하려고 나름대로 많이 애쓰셨다는 것을.
예전에는 내가 처한 상황이 남들과 다르게 느껴지고, 친구들에게 가족 내의 다정한 사건들을 이야기하는 누군가의 모습 자체가 꼴 보기 싫었던 (철없다고 포장하기 힘들지 모르는) 어린 시절의 언젠가도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나 자신, 상황을 해결할 수 없는 어린 나, 집안 상황에 걸맞지 않게 철없이 행동하고 능력이 없는 나 스스로를 비하하면서 냉소적인 태도로 세상을 아는 척 지껄였다.
인간관계는 이익 경쟁과 다양한 상황이 존재하기 때문에 영원한 친구도 원수도 없다.
이 말이 나에게는 과거와 지금, 같은 말 다른 의미이다. 각자는 각자의 사정이 있음을 냉소적인 시선이 아니라, 공감의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살고자 노력한다. 영원한 원망을 가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영원히 좋은 사람이길 강요하지도 않으려고 노력한다.
이생에서 진실로 하고 싶었던 일은 이것뿐이었다. 망상이고 환상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십 대와 이십 대의 나는 나에게 너무 모진 인간이었다. 내가 나라는 이유만으로 미워하고 부당하게 대했던 것에 대해 그때의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 애에게 맛있는 음식도 해주고 어깨도 주물러 주고 모든 것이 괜찮지리라고 말해주고 싶다. 따뜻하고 밝은 곳에 데려가서 그 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다. 그렇게 겁이 많은데도 용기를 내줘서, 여기까지 함께 와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자기 자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멸시와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쪽에서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작가가 되고 싶다. 그 길에서 나 또한 두려움 없이, 온전한 나 자신이 되었으면 좋겠다.
- 최은영, <쇼코의 미소> 책의 '작가의 말'에서
최은영 작가님이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너무나 좋은 문장으로 잘 써준 것 같다. 나에게도 남에게도 모질지 않은 따뜻한 사람으로 살고 싶다. 그리고 그 따뜻함을 전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모진 일들 속에서 모질게 변해버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다. 그래서 이렇게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