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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몬 Sep 27. 2024

아침 7시, 엄마! 학교 가기 싫어요.

교사도 학교 가기 싫을 수 있어요.



발걸음 한 번 떼는 것이, 기절보다 두렵다. 

신경 쓸 필요 없는 먼지 한 조각 조차 날 향해 낄낄거리는 듯하다. 


지옥 같은 기억에 갇혀, 멀쩡한 공간도 숨쉴틈 없이 비좁아진다. 

타인이 보내는 보통의 시선도, 유리가루를 푼 물을 마시는 목처럼 지독히 따끔거린다. 


그저 앉아만 있어도 모든 사물이 나를 훔쳐보는 것 같다. 


공간과 기억에 내 모든 것이 삼켜지면, 

동정심 이후 지나가는 '그럴만했다.'는
무책임하고 주인 없는 말만 덩그러니 남는다. 


공허함이 느껴지는 벤치.








글을 쓰려는 사람들은 언젠가 자기 안에 있었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나'라는 인간을 복원하고자 노력한다. 사적인 글쓰기가 간지럽거나 오글거리는 이유는 애초에 그런 이유로 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좋은 것을 좋은 대로 벅차게 솔직하게 쓰는 것을 언젠가부터 오글거린다고 한다. 


어떤 일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다음 발걸음을 내딛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상처에 대해 쓸 수 있다는 말은 상처를 잊었다는 뜻이 아니라 상처와 함께 사는 법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다혜 작가의 <처음부터 잘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중에서 



충북 제천에 첫 발령을 받았다. 

운동부가 많은 학교였다. 하루에 40명씩도 전출, 전입이 있는 큰 중학교. 학적 업무라고 학생들 전출입을 위해 생활기록부를 정리, 전송하고 전출전입 학교와 소통하는 업무를 했다. 나 혼자 다 정리하면 좋으련만 전출입 가는 반의 담임선생님들 및 교과선생님들의 협조를 얻어야 하고 타 학교에 요청도 해야 돼서 생각보다 협조를 많이 구하고 사람을 다뤄야 하는 업무다. (요즘은 실무사님들이 대부분 해주신다.), 방과 후 7,8교시(충청북도는 고입시험이 있었는데, 떨어지면 재수했다. 고입시험에 도덕이 들어가는 바람에 도덕조차 방과 후를 했다.)와 수업 23 시수(하루 6,7 교시 중에 평균 5시간은 해야 하는 수업 시간이다.), 1, 2학년 걸쳐서 수업 들어가기(수업을 2개 준비해야 한다.), 토요일도 수업 있었음(과거엔 격주로 토요일에 학교를 갔다.), 처음 와보는 도시에서 자취하기, 남학생학급(남녀분반학교였다) 담임교사. 


모든 것이 합쳐지면서 신규교사였던 나의 역량을 넘어섰다. 그래서 여기저기 밑 빠진 독처럼 일도, 마음도 구멍 나고 내 상황을 똑바로 인지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그 결과인지 우연의 일치인지, 교권침해사안을 겪었다. 친절한 척하던 그 아이들이 알고 보니 작당모의하여 내 치마 밑이나 찍을 생각을 하다니. 나를 기만하고 있었는데 몰랐구나라는 생각이 배신감과 함께 덮치면서 내 기분을 최악으로 만들었다. 


조금 더 자세한 실질적 내용은 브런치 이전 글에 썼었다. 


https://brunch.co.kr/@lilymwhn/9

(내 경험 & 경험을 시작으로, 고민해서 얻은 내 나름의 생활지도에 대한 생각을 쓴 글이다.) 


학생들은 가끔 학교 가기 싫어 볼멘소리를 하는데, 교사도 학교가 가기 싫을 수 있다. 


학생일 때는 선생님도 학교오기 싫을 수 있다는 생각조차 안 해본 것 같다. 

교권침해를 겪고 나니, 교사를 그만두고 다른 걸 해야 하나 내 인생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착하게 살려고 했더니 역시 나쁜 게 최고인가 인간은 원래 잘해줄 필요 없는 것인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교권침해자체로 힘들었기도 하지만, 어떤 부분에서 내가 힘든지 스스로 알아차릴 힘이 없었다. 

스스로 성찰자체를 할 기력이 없었던 것 같다. 친했던 언니가 여름 방학에 나를 만나 나의 신규발령 1학기 동안 상처받은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너는 진심으로 아이들을 대했는데, 그 아이들이 진심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많이 상처받은 거구나."

언니의 말을 통해 내가 왜 그렇게 침잠하고 우울해졌는지 처음으로 뚜렷하게 생각해 보고, 알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건'에 대해서 힘들었겠다고 말했는데, 나랑 동고동락(기숙사)하면서 나를 지켜봐 왔던 언니는 내가 사건 자체 보다 그 아이들의 마음에 대해 상처받아서 힘들어진 것 같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고 있던 내 마음을 읽어줘서 진심으로 고마웠다. 


어쩌면 오만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많이 했다. 아이들에게 '어른'이었어야 하는데, 미처 그러지 못했던 것 같았다. 


현 학생부 담당 교사로서, 때때로 피해학생들이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이 보인다. 물론 사람마다의 회복 탄력성이 다르겠지만 '피해자'의 입장에 원치 않게 섰던 내 경우를 비춰보면 역시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가 없어서 마음이 걱정스럽다. 


나는 그 당시에, 

좋지 않은 일을 겪게 된 상황 자체에서 오는 압박, 좋지 않은 일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방어하지 못했다는 나 스스로에 대한 실망, 좌절, 나약한 사람의 입장에 서게 된 굴욕감이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괜찮은 척 웃기 위한 입 근육도, 그 공간에 돌아가서 걸어야 하는 발걸음도 모두 납덩이를 짊어진 것처럼 무거웠다. 사람들은 자신의 일이 아니면 각별한 관심을 쏟기 어려운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심을 쏟고 함께 울어주고 대신 일해주는 선생님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러한 도움조차 하나의 날카로운 시선조각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도움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래도 그냥, 출근하고 출근했다. 언젠가 비이성적인 내 심장이 하루하루의 루틴 속에 제정신을 찾길 바라면서. 업무용 메신저를 읽어보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점심을 먹고 퇴근을 하고. 

아이들을 똑같이 만나고, 반에 들어가고 끔찍한 공간도 다시 열심히 지나다녔다. 


누가 볼 땐 괜찮은가 보다 했겠지만 전혀 괜찮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괜찮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만한 상태도 아니었다. 내가 살기 위해 지금 난 괜찮다고 여길수밖에 없는 미친 상태가 존재한다는 것을, 무엇인가 겪지 않은 사람은 공감하지 못할 수 있을 것 같다. 





신규교사 때의 사건이 어쩌면 내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어 감사한 부분도 없지 않아 있다. 

하루하루 지나가면서 조금씩 나를 돌아볼 수 있게 되었을 때. 

인간관계를 할 때 진심을 주어야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에 대해 예전보다 많이 구별하게 되었다. 

(안 좋은 걸까? 아직은 모르겠다.)

그저 상처받지 않으려고 일지도 모르지만, 진심을 주어도 괜찮을 사람에게는 진심을 주고 인간적인 도움을 주고받고 진심을 주어서 문제가 될 성품(인성보다 힘이 우열인 삶의 태도를 지닌 사람, 이기심과 비겁함이 성품으로 자리 잡은 사람 등)을 가진 사람에 대해서는 기대하지 않되, 내가 너에 비해 힘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해 준다. 그래서 피해를 보지 않되, 상대방이 도움이 필요할 때는 기대하지 않는 선에서 도운 후 내 삶에 집중한다. 왜 도와주냐고 할 수 있는데 그 상대방이라 함은 나보다 어린 학생, 어려운 삶의 문제에 직면하여 도와줄 사람이 없는 경우의 어떤 사람 정도로 한정된다. 인격이 낮은 이는 물에 빠진 사람 구해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 한다는 속담에 충실한, 추후 태도를 보이기 쉽기 때문에 인간적 차원에서 기대하지 않고 도와준 후, 거리를 둔다. 



그래도, 훗날 진심은 결국 통한다는 내 신조를 유지할 수 있게 도와준 고마운 아이들. 

오늘도, 내일도 일어나고, 자고 밥 챙겨 먹고 열심히 걷고 그냥저냥 투덜대기도 하고 하루를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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