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친구의 결혼식이 있었다. 장소는 내가 나고 자란 고향이었다. 그간 친한 친구들의 결혼식이 있을 때마다 줄곧 나는 병원에 입원해 있거나 컨디션 난조로 꼼짝하기 힘들었다. 다행히 체력이 안정적으로 올라온 요즘이라 기쁘고 설레는 마음으로 다녀왔다. 한때는 고속도로에서 고향 이름이 적힌 표지판만 봐도 휘몰아치는 감정을 감당하기 어려워 눈을 질끈 감았던 적도 많았다. 도로를 지날 때 익숙한 건물들이나 TV에서 고향 관련 영상이 나와도 황급히 외면하곤 했다. 오한과 구토 증상으로 속을 다 게워내고 금식 중일 때 회사 근처에서 자주 먹던 노포의 육개장이 눈물 나게 그리워 사무칠 때도 차마 가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러던 내가 지난 주말 제 발로 고향을 찾은 건 눈에 띄는 변화이자 도전이었다. 도시로 진입하는 순간 익숙한 듯 낯선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미팅차 들렀던 곳, 종종거리며 취재 다니던 곳, 남편과 데이트하던 곳의 전경이 차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갔다.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남편에게 "여기 기억나? 여기 뭔가 많이 바뀌었다.."라며 괜히 말도 걸어보았다.
친구의 결혼식은 야외웨딩이었다. 4월의 투명한 햇살, 이제 막 살이 오른 잔디의 여린 초록, 꽃으로 에워싼 버진로드, 그늘 없이 행복으로 가득 찬 신부의 설레는 표정..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다. 주례 없이 양가 아버지의 덕담과 감미로운 축가로 마무리하는 결혼식을 보는 내내 왜 내 눈가가 촉촉해졌던 건지.. 15년 만에 만난 아버지가 혼주석에 앉아있는 모습이 낯설어 신부 측 부모님께 인사할 때에도 미처 고개를 숙이지 못했던 나였다. 이런저런 생각에 매몰되면 신부 얼굴이 금세 서러운 표정으로 바뀔까 봐 나는 그저 맞지 않는 구두가 조여 오는 발의 통증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축가에 맞춰 살랑살랑 춤추는 친구의 모습을 보며 내 속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스쳤다. 동시에 진심으로 친구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할 수 있길 바랐다.
결혼식을 마치고 친구집에서 하루 묵었다. 고향이지만 그곳에 나의 친정은 없었으므로, 그날 하루 친구 집이 나의 묵을 곳이었다. 친구들을 만난 건 8년 전 내 결혼식 이후 처음이었다. 각자 사는 게 바빠 SNS로 연락을 이어오면서도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친정이 대전이면서 그동안 왜 놀러 오지 않았느냐고 물었지만 나는 그저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식이 끝나고 근처 백화점을 구경하자는 친구들에게 나는 그냥 너희 집으로 가자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백화점에 자주 다니던 엄마를 행여나 마주칠 수도 있다는 노파심에서였다. 고향에 오랜만에 온 친구에게 핫한 곳을 소개해주고 싶었다던 친구들은 영 실망스러운 기색이었다. 친구 집에 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마음껏 수다타임을 가졌다. 옛날 추억 얘기부터 뭐해먹고 사는지 등등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달콤했다. 집 근처 칼국수 집에서 그토록 먹고 싶던 두부두루치기도 먹었다. 맵칼한 양념을 듬뿍 머금은 포슬한 두부에 칼국수 사리를 추가하면 감탄사가 연신 터져 나온다. 든든해진 배를 빵빵 두드리며 어둑해진 골목길을 걸었다. 다시 20대 초반의 소녀들이 된 것마냥 슬리퍼를 찍찍 끌면서.
집에 돌아와서는 달큰한 스파클링 와인 한 병을 땄다. 무드조명을 켜고 여자 셋은 둘러앉았다. 그리고 나는 입을 열었다. 그동안 내가 고향에 오지 않았던, 못했던 이유에 대해서 속 시원히 털어놓았다.
많이 아프기도 했고, 엄마와 더 이상 연락하고 지내지 않고 있고 그러므로 내게 이곳은 친정이 사라진 도시라고 고백했다.
친구들은 잠자코 들어주었다. 드문드문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전혀 몰랐다고, 너에게 그런 사정이 있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이제야 너희들에게 입 밖으로 꺼낼 용기가 났다고 답했다.
신기한 건 막상 친구들에게 지난한 세월을 고백하면서 눈물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서러운 세월을 떠올리면 그 시간을 입 밖으로 꺼내면 언제나 눈물부터 차오르던 나였다. 어찌 된 일인지 그날은 너무나도 담담했다. 마치 브리핑하듯 그간의 에피소드를 정리해 꺼내놓았다. 이미 글을 쓰면서 내 안의 사건들에 대한 답을 찾은 덕일까. 말하면서 울지 않는 내가 신기하고 낯설었다. 친구들과 즐거운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은 시댁에서 자고 온 남편, 딸과 재회했다.
학창 시절 자주 가던 떡볶이집에 가서 추억의 분식을 먹었다. 나는 7살짜리 딸의 엄마가 되었지만 그 시절 떡볶이 맛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일요일 점심, 여전히 사람들로 붐비는 추억의 번화가를 거닐며 나의 안녕을 확인했다. 표지판만 보고도 구역질이 나올 만큼 나약했던 나는 이제 그 도시의 한복판을 거닐 수 있다. 친정이었던 이 도시를 과거에 묻어둔다. 아마 자주 올 일은 없겠지만 다음번엔 조금 더 홀가분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