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터 100까지라면 100, 한계가 없으면 억만큼
<지난 토요일 저녁에 써둔 글임을 미리 밝힌다>
주말이다. 누구나 주말은 늘 반갑다지만 엄마모드에서는 백 퍼센트 공감이 어렵다. 아이 등교준비로 바쁜 아침 치다꺼리는 없으나 종일 심심함을 호소하는 꼬맹이와 시간을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방학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주말은 어째서 이토록 빨리 돌아오는지.. 남편이 출근까지 하는 주말이면 더 막막하다. 삼시세끼 단탄지 영양성분을 고루 갖춘 식단과 적당한 미디어 시청과 학습유도, 틈틈이 보드게임까지.. 외출하지 않고 집에서 하루를 보내는 주말에는 그야말로 엄마력을 최대치로 발휘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바람과 상상일 뿐. 난 그렇게 체계적인 인간이 아니다.
언제나 나보다 먼저 일어나는 딸은 토요일이랍시고 늦잠 자는 엄마의 잔소리를 피해 이미 하루치 TV시청시간을 훌쩍 넘겼고, 느지막이 일어나도 온몸이 찌뿌둥한 엄마는 아침도 점심도 아닌 오묘한 시간대에 첫 끼를 내어준다. 그리고 환기를 시킨 뒤 청소기, 세탁기, 건조기 돌리기 쓰리콤보를 엮어 해치우고 설거지까지 마친다.
"아침부터 영상 실컷 봤으니 이제 책도 좀 봐야지~?"
합당한 근거를 들어 아이와 나는 각자 자리에서 책을 읽기 시작한다. 그런데 앉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혈당스파이크 이슈로 또 꾸벅꾸벅 졸고 있는 나란 인간..(올빼미 스타일이라 낮에 매우 피곤한 유형임을 밝힌다) 평일이나 주말이나 집에 있는 건 같은데 어째 주말이 더 피곤한 것 같은지. 식후에 애착담요를 덮고 소파에 앉아 책을 펼치면 분명 잠이 솔솔 올걸 알면서도 가장 편한 자세로 독서를 청한 탓이다. 그래봤자 한 10분 정도 졸았나? 슬금 눈을 뜬 사이에 아이랑 눈이 마주쳤다.
"엄마, 다 쉬었지? 이제 나랑 놀자!"기다렸다는 듯 달려드는 딸. 운이 안 좋았다. 잠깐 눈 뜨고 동태를 살핀 뒤 더 자는 척할 수도 있었는데..
"야~ 언제까지 내가 너랑 놀아줘야 되냐~" 앓는 소리를 해봐도 소용없다. 팔을 잡아 끄는 아이에게 몸을 내맡긴 채 문어처럼 축 늘어진 척했더니 딸은 샐쭉해져서 발을 쿵쿵 구르며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아.. 이미 몸은 소파와 하나가 되었고, 체온으로 적당히 포근해진 담요에서 몸을 빼고 싶지 않은데... 토라진 줄 알면서도 몸뚱이는 내 맘과 달리 게으름을 부렸다. 그래도 정신 차리고 읏챠, 살금살금 아이 방 앞으로 가서 고개를 빼꼼 먼저 내밀었다. 인중을 길게 늘여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쳐다보니 딸은 날 흘겨보면서 나가라는 듯 훠이훠이 손을 휘젓는다.
"뭐야, 같이 놀려고 왔는데.." 하니 아이가 강아지처럼 "진짜?"라며 침대 위 이불을 걷어 자리를 만든다. 패드를 탁, 탁 치면서 앉으란다.
"무슨 놀이할 건데.."
"인형놀이! 여기가 산리오 마을이야. 시나모롤, 폼폼푸린, 키티랑 마이멜로디, 쿠로미랑 몰랑이도 살아."
휴, 그놈에 인형놀이. 내가 정말 어려워하는 놀이 장르다. 하나마나 한 이야기를 애교 섞인 목소리로 주고받는 게 영 취향에 안 맞는다. 차라리 스쾃 100개를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할 만큼 질색이다. 하지만 딸 엄마로서 결코 인형놀이를 피해 갈 방법은 없을 거다. 인형을 들어 들썩이며 그들에 빙의된 척 "너는 어디 가니? 난 놀이동산에 가~" 같은 시답잖은 대화를 몇 번쯤 주고받았을까. 그 잠깐에도 하품이 스무 번은 새어 나왔다. 싱글침대는 인형들의 집이자, 놀이터, 학교, 식당, 카페로 배경이 수시로 바뀌었고, 나는 나름 최선을 다해 그 장단에 맞추는 '척' 했다. "이제 됐지?" 하니 딸은 펄쩍 뛰면서 내 팔을 잡았다.
"아니!"
"인형놀이 해 줬잖아~"
"모자라! 나는 엄마가 집안일하는 것도 기다리고, 책 읽다가 조는 것도 기다렸다가 놀아달라고 하는데 엄마는 이것밖에 안 놀아주냐?" 뜨끔.
"아~ 엄마는 인형놀이가 정말 어렵단 말이야. 그럼 차라리 보드게임을 할까?"
"난 인형놀이가 하고 싶어!" "아아아~" 하면서 풀썩 드러누우니 딸이 말한다.
"엄마는 사랑한다면서 그것도 못해줘?" 곧바로 울먹이려는 표정. 이러는 애가 아닌데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다.
"왜 울려고 그래, 엄마가 재밌게 놀아주지도 못하는데 나랑 노는 게 그렇게 좋아?"
"응. 1부터 100까지 라면 100, 한계가 없으면 억만큼"하면서 끝내 엉엉 운다. 이건 삐친 척하는 게 아니라 정말 속에서 우러나오는 서러움의 울음이다. 몬생기게 늘어지는 입꼬리와 쪼그라드는 미간, 시 뻘게지는 이마와 볼때기 톤을 보면 알 수 있다.
오, 미안해 미안해. 불과 며칠 전에는 아이가 너무 빨리 커버리는 게 아깝다는 둥 나중에 어떻게 기억하냐는 둥 세상 애틋하고 다정한 엄마인 척 장황한 글을 썼으면서도 오늘 고작 인형놀이 하자는 애를 서럽게 울리는 사람이 바로 나다. 아이에게 가장 큰 숫자는 억인데, 그만큼 나랑 노는 게 재밌다는데, 그마저도 인형놀이는 취향이 아니라는 뻘 소리를 늘어놓는 사람이 나다. 그렇게 애를 울려놓고 또 문자로는 사랑을 말하는 사람이 나다. 그러니까 내가 사랑하는걸 넌 꼭 알아줘야 한다고 요구하는 사람이 나다.
민망하고 미안해져서 어쨌든 인형놀이를 좀 더 성의껏 연장하다가, 저녁에는 인라인 연습도 하고, 피아노 연주 맞추기 놀이도 하면서 반성하는 마음으로 남은 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남편이 퇴근하고 오자마자 딸이 하는 말.
"아빠 나 엄마가 안 놀아줘서 아까 울었어." 억울하지만 사실이라 변명의 여지는 없다. 그래도 종일 붙어서 지지고 볶았구먼 까먹지도 않아. 지지배. 하루가 빨리 저물고, 내일이 됐으면 좋겠다.
내일은 더 잘해줄 거니까. 하지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내일이 돼도 여전히 인형놀이는 싫을 것 같은데, 하품은 계속 나올 것 같은데..
그러니 또 깨닫는 수밖에. 아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는구나.
엄마 일하는 것도, 집안일하는 것도, 늦잠 자는 것도, 책 보다 조는 것도 기다렸다가 놀자고 할 만큼, 성에 한참 모자라게 놀아줘도 또 놀고 싶을 만큼.
하여간 어른들이란 언제나 입만 번지르르하다.
정작 눈빛으로 몸짓으로 생각으로 사랑을 보여주는 건 아이들이다.
그래서 이토록 장황한 변명일지를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