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딸을 원하세요?

by 김윤담

요즘 내 인스타그램 알고리즘엔 젠더리빌 영상이 종종 뜬다. 대개 이런 식이다. 부부가 설레는 표정으로 커다란 검은색 풍선을 들고 서 있다. 손끝의 바늘이 풍선에 닿는 순간 분홍색 또는 파란색 컨페티가 뿜어져 나온다. 서로 다른 영상임에도 분홍색일 때와 파란색일 때의 반응은 사뭇 다르다. 딸로 확정된 쪽은 기쁨에 서로를 부둥켜안고 아들임이 확인된 쪽은 어쩐지 씁쓸한 미소와 위로와 다독임이 오간다. 남아선호사상으로 점철되어 있던 대한민국이 언제 이렇게 절대적인 여아선호사상으로 변한 걸까? 문득 호기심이 든다.


이토록 딸을 원하는 분위기가 마치 트렌드처럼 자리 잡은 시대라니 그렇다면 딸을 낳아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나는 이미 위너인가. 임신 당시 산부인과 정기검진에서 아이가 딸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딸임을 확인한 젠더리빌 영상 속 부부들의 반응과는 다른 감정을 느꼈다. 섬뜩했달까. 아이의 존재를 두고 이런 표현을 쓰는 것이 적합하지 않은 듯 하지만 분명 그랬다. 뱃속에 자리 잡은 아이에게서 내 인생이 다시 한번 더 재연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때 아이는 나와 한 몸이었으므로 멍청한 착각에 빠졌었다. 그 당시 내게 임신은 아이 존재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에 설레는 과정이기보다 그저 엄마라는 위치에 나를 놓아보고 싶었던 실험이 실현된 상태에 가까웠기 때문에 충분이 상상하지 못한 채 알게 된 아이의 성별은 뒤늦게 찾아온 사춘기처럼 많은 생각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임산부 요가 모임에서 하필 안면을 튼 사람들의 아이가 모두 아들이었을 때 나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딸이라니 얼마나 좋아. 첫 딸은 너무 든든하겠다. 입을 모아 말했다. 궁금했다. 왜 딸을 원하세요?

딸은 평생 친구잖아요. 아들은 크면 다 소용없다니까.


어째서 딸은 태어나기 전부터 그런 기대와 바람을 당연히 충족시켜줄 대상으로 짐작되는가. 딸이든 아들이든 친구같은 사이가 될 수 있을텐데. 딸은 당연히 역할이 정해져있는것처럼 단언하는 대화가 내내 불편했더랬다. 모녀사이란 대체 뭘까. 서로를 동일시하면서 동시에 완전한 타인인 그 미묘한 간격이 누군가에겐 인생 최고의 행복일수도, 불행일수도 있다는 전제는 그들에게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딸은 단지 살갑고 귀엽고 무한한 애정을 뿜어낼 존재로 기대하고, 그 기대가 충족될거라고 믿기 때문에 그토록 기쁘고 부러운것인지 궁금해졌다. 그런 기대 속에 태어난 아이들이 살기에 진정 좋은 세상인지. 여자로 살아가는 본인들은 정말로 행복한지 물어보고싶기도 했다.


딸과의 관계를 한가지 색깔로만 정의한 세상의 시선 속에서 내가 왜 뱃속 아이가 딸이 아니길 바랐는지 깨달았다. 동시에 엄마가 왜 그렇게 나를 못마땅해했는지도. 그들이 미리 정해놓은 역할에 부합하지 않은 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무조건 엄마의 편일 것. 엄마를 외롭지 않게 할 것. 엄마의 삶을 이해하고 가여워한 나머지 엄마의 엄마 역할을 하는데 몰두할 것. 같은 여자니까. 너는 다 알아야 하니까. 너는 나니까.


미안해 엄마, 나는 그런 딸이 되지 못했어. 그런 내가 딸의 엄마가 된다니 두려웠어. 그토록 무거웠던 바람을

딸에게 내가 전하게 될까 봐. 그 아이가 나처럼 불행해질까 봐. 나처럼 엄마를 미워할까 봐.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가끔 상상한다. 어쩌면 엄마만큼 외로울 노년을... 딸이 좋은 친구가 되어주지 않는, 영원히 나를 몰라주는, 나름의 최선으로 사랑으로 키운 그 아이가 말이다. 그러다 '나름'은 너무나 개인적인 데다가 이기적인 명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름'은 모든 걸 방어하는 방패처럼 나의 최선만을 이야기하니까. 마침표를 먼저 찍어버리니까. 엄마의 인생을 몰랐던 게 아니다. 그저 나의 생을 살고 싶었을 뿐. 그녀를 버린 것이 아니라 그저 두었을 뿐.


그럼에도 내가 엄마를 진정으로 사랑했다는 증거는 있다. 그토록 엄마를 미워하던 내가 누군가의 엄마가 되어보기로 하고 그렇게 된 것. 엄마가 됨으로써 이해하고 끝내 끌어안아보고 싶었던 발버둥이 내겐 임신과 출산과 육아의 과정이었다. 처음 마음먹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결말로 끝을 맺었지만...


그러니 나는 나의 딸이 키워보니 다 소용없는 딸이어도 괜찮다. 품어본 기억과 길러본 경험 그리하여 세상을 다 가진 느낌도 이미 다 내 것이 되었으니까. 아이가 내게 준 시간을 흡수하면서 스스로를 다시 키워볼 수 있었으니까. 비로소 지긋지긋했던 모녀관계를 분리함으로써 정당해질 수 있었던 건 나의 엄마가 아닌 나의 딸이 쥐어준 면죄부 덕분이었다. 분명 고통스러웠으나 홀가분했다. 이런 나를 두고 누군가 입바른 소리라고 혀를 차면 보란 듯 할머니가 되어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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