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윤담 Feb 12. 2024

오늘도 7살인 네가 나보다 더 크다

그럴 때가 있다. 집 밖에서 만난 사람들의 무례한 행동엔 순간 분하고 당황해 어버버 말도 제대로 못 하다가 돌아와선 후회하고, 집에선 아이의 사소한 실수나 게으름에도 성인군자처럼 따박따박 빈틈없는 논리를 들어 아이를 다그친다.


누구에게도 쉽게 내비쳤던 적 없는 고압적인 눈빛, 무시하며 비아냥대는 말투, 아이의 말이 끝나기 전에 내 논리부터 펼치는 이기적인 태도의 쓰리 콤보는 너무나도 시원하게 뿜어져 나온다.


아이가 무언가 명백하게 잘못했을 때 위세는 더 위풍당당하다.

얼어붙는 아이의 눈빛과 말려드는 어깨를 보고 있으면 승리감에 도취되는 느낌마저 든다.

기가 팍 죽은 아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건 쏟아낼 만큼 쏟아낸 뒤의 일이다.


나 스스로 부모의 감정쓰레기통으로 자라왔기에 부모의 감정적인 태도가 아이에게 어떤 악영향을 미치는지 잘 알지만, 때때로 아니 자주, 나보다 작고 여린 아이는 공격의 대상이 된다.


버릇을 제대로 들인다는 명목하에 나조차도 나쁜 엄마가 되고 마는 것이다. 부끄럽지만 그런 사례가 너무 많아서 일일이 손으로 다 꼽을 수 없을 정도다.


나는 노력하는 엄마라고, 내 엄마보다 나은 엄마라고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지만 내가 그렇게 되고 싶은 거지 진짜로 그런 엄마인지는.. 사실 자신이 없다.


오늘도 일하는데 옆에 와서 자꾸 장난을 거는 아이에게 '버럭'하고 말았다. 엄마 일하는 거 알면서 왜 자꾸 방해하는 행동을 하느냐고, 네 할 일은 다 했느냐고, 너 때문에 집중이 하나도 안된다는 말까지 기어코 덧붙이고 말았다. 그 말과 함께 쏘아 보냈던 싸늘한 눈빛은 다분히 의도적이었고, 잔인했다.


그저 엄마가 너무 좋아서, 같이 놀고 싶어서 그런 것이라는 생각은 늘 호통 뒤에 마침표처럼 따라붙는다.

차라리 모르면 나을까 싶지만 뒤늦게 발견하는 한 톨의 양심은 늘 나를 괴롭힌다.


나한테 크게 한 방 먹고도 딸내미는 "이리 와봐." 한 마디에 쪼르르 달려온다.

엄마가 소리를 내지른다음 반성하는 타이밍을 녀석도 아는 거다.

가슴팍에 폭 안기는 딸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말간 눈을 한 아이가 웃기려는 듯 콧구멍을 벌름거린다.

못 이기는 척 푸합, 웃음을 터뜨리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크하항 구멍 숭숭 난 이빨을 드러내며 깔깔거린다.


엄마는 왜 나한테 미안할 때 이리 와봐!
그러곤 그렇게 쳐다봐?
그냥 미안하다고 하면 되지.


너는 어쩜 다 아니. 나보다 더 나를 아니.

여러모로 아이는 나보다 진화한 존재라는 말, 정말 맞다.

이 아이를 얕보다간 되레 내가 큰코다칠 거다.


오늘 밤도 노트북 앞에 앉아 이 못난 엄마, 나쁜 엄마는 타자를 치며 모자람을 고백하고 반성하고야 마는구나.

아마 나는 얼마 못 가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하겠지만 그래도 하나는 안다.

자식은 언제나 부모를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앞니가 훤한 7살짜리마저도 말이다.

내가 용서를 구하는 한, 아이는 날 용서해 줄 것이기에 조금 부족한 엄마여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여본다.


오늘도 엄마가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