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이 잠깐 열렸다가 이내 닫혀버렸다
이따금씩 학창 시절을 생각해보면 유달리 조용하고 소심한 친구들이 있었다. 두루 어울려 지내고 싶어도 막상 그 친구들이 낯설어하고 거리감을 두면 같은 친구끼리 왜 그러지 하는 생각과 함께 낯을 가리는 그 친구와 더 어울리기 쉽지 않다 판단하고 적당한 거리를 두며 반 친구라는, 동갑내기 친구라는 타이틀에 묶여 있을 뿐 이렇다 할 관계를 맺지 않았다.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반장이었다. 왜 반장을 하겠노라 다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중학교 3학년도 아니고 고등학교 3학년이 될 무렵 반장을 서슴없이 지원했다. 그동안 반장을 해 본 경험이 있던 적도 없고 남들 앞에 나서서 무언가를 평소 이끌던 성격도 아니었는데 내 학창 시절에 반장을 꼭 해보고 싶었다. 평소 공부를 잘하던 성격도 아니고 그냥 판타지 소설이나 자주 읽고 판타지 소설을 창작하기 좋아하던 그냥 평범하기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다.
성적은 정말 형편없었다. 그마저도 중학교 때는 성적이 꽤 나오던 편에 속했는데 고등학교 때는 대체 내신 관리를 했던 것인지 아주 박살이 나 있었다. 그나마 정신 차리고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공부를 하기 시작했었지만 이미 무너져 있던 성적과 내신 관리는 요단강을 건너간 상태였다. 그만큼 눈에 띄던 아이가 아니었고 몇몇 친구들과 하교 후 피시방에 들려 스타크래프트를 즐기던 정말 평범한 학생이었다.
공교롭게도 성실했다. 게임 좋아하고, 학교에서 소설책이나 읽던 놈이 성실과 무슨 연관성이 있냐 얘기하면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성실했다. 학교 한 번 안 빠지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학교는 참 성실하게 다녔고 감기 몸살이 정말 독하게 와도 학교엔 꼭 갔다. 심지어 아파서 학교에 가서 하루 종일 끙끙 앓는 순간이 오더라도 아파도 학교 가서 아팠고 놀더라도 학교에서 놀았다.
놀다 보니 공부가 하고 싶어 졌던 걸까. 말도 안 되지만 고등학교 2학년 때 공부를 시작했다. 지독하게 공부를 시작했다. 첫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던 열여덟 살의 내가 세웠던 첫 번째 목표는 놀랍게도 '책상에서 잠들지 않기'였다. 아무리 졸린 수업도 책상에서 졸지 않고 다 들어보기로 한 것이었다. 정말 학교 공부는 너무나 재미없어서 공부를 도무지 열심히 할 수 없었는데, 그 와중에 세운 첫 번째 목표는 정말 지금 보면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심지어 이 또한 작심삼일이라며 삼 일간 해 보자는 것이 첫 번째 목표였다.
삼일만 지키자는 약속을 세우니 생각보다 부담이 없었다. 첫날에 엉덩이에 땀띠가 나기 시작하고 머리에 쥐가 나기 시작했다. 친한 몇몇 친구들은 왜 애써 사서 고생을 하냐며 옆에서 하염없이 잠을 자고, 평소 공부를 잘하던 친구들은 공부도 안 하던 애가 왜 갑자기 공부를 한다고 난리냐며 의아하게 쳐다보기도 일쑤였다.
정말 힘들었다. 하루 온종일 정신적으로 녹초가 되기도 할뿐더러 내가 잘하고 있냐는 생각이 사무치게 들었다. 수업 시간에 깨 있고 잠을 자지 않으니 정말 할 일이 없었다. 오직 칠판만 바라보고 있는 나 자신이 멍하게 느껴질 무렵 너무 심심해서 펜을 잡았다. 공책을 펴고 선생님이 적는 내용을 무작정 옮겨 적듯 공책에 빼곡히 내용을 담아가기 시작했다.
이해는 되지 않았고, 내 것이라는 생각이 정말 하나도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무언가 노력한다는 것이 정말 피가 되고 살이 되어서 나에게 한줄기 빛이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삼일이 지나자, 다시 한 번 삼일의 동일한 목표를 세웠다. 내 것으로 이해를 하고 만들어야 하지만 쉽지는 않았기에 공부를 하고 전부 내 것으로 만든다는 생각보다도 여전히 나의 목표는 앉아서 졸지 않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참 재밌는 게 제 아무리 마음먹은 일도 삼일을 넘기기 힘든 말이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하면 삼일만 먹은 목표를 달성하면 그 어떤 일도 동등하게 해낼 수 있다는 말로 이해가 됐다. 삼 일간 졸지 않는 목표를 달성하자 동일한 목표를 달성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더 큰 자극제가 되었다. 작고 어쩌면 무의미한 노력과 도전이지만, 나에게 있어 하나의 커다란 목표를 달성했다는 성취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오늘 지금 이 순간 갑자기 스마트폰을 빼앗아서 1년간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면 정말 사무치게 고통스러울 텐데, 그 당시에는 현재의 온라인 디톡스와 같은 시도를 강제로 실행했다. 잘 사용하고 있던 휴대폰을 불현듯 하루아침에 사용을 중지했다. 단순히 들고 다니지 않은 것을 넘어서서 휴대폰 자체를 없애버렸다. 고등학교 1학년 진학 선물로 휴대폰을 사달라고 일 년 내내 졸랐던 모습이 무색할 만큼 갑작스러운 파격적인 모습에 부모님도 적잖이 당황하셨다.
'Sky, It's different.'
지금 생각해보면 참 아재라고 느껴지지만, 지금 생각해도 저 음성은 짜릿하고 180도 회전하는 카메라를 처음 가졌던 내게 있어 황홀함을 줬던 그런 휴대폰이었는데 어디서 그런 커다란 결단력을 가지게 되었는지 아무리 곱씹어 봐도 희한하고 대단하다.
노력한 만큼 성과가 따라주면 참 좋을 텐데 성적은 안타깝게도 그러진 못했다. 작심 삼일로 시작한 계획은 일주일이 되고 한 달이 되면서 스스로에게 강한 결의를 만들어줬다. 하루 온종일 공부를 하더라도 어렵지 않게 공부를 하게 만들어줬고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서 있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게 만들어줬다. 그러나 시간을 투자한 만큼 모든 사람이 동등한 결과를 얻으면 좋겠지만 당시의 나는 공부하는 법을 잘 아는 편은 아니었다.
지금이야 유튜브를 통해 공부하는 법. 암기하는 법. 공식 이해하는 법 등 온갖 유용한 방법들이 난무하고, 좋은 해결책을 편리하고 쉽게 정리해서 올려 둔 영상들이 널려있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못했다. 인터넷에 그렇다더라 하는 방법을 어렵사리 찾아 검색해서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그냥 두리뭉실한 방법 중 카더라 하는 방법을 찾아서 했었다.
영어 연상 기법으로 외우는 방법은 그래도 신빙성이 좀 있다고 생각하는 게 당시 영어 단어를 외우던 중 연상 기법(무엇과 연관 지어 외우면 잘 외워진다)을 통해 외우면 잘 외워진다는 이야기를 듣고 곱씹어 따라 하다가 문득 연관 지어 외운 단어가 있었는데 1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하는 걸 보면 참 유용하긴 했었다.
Opportunity 기회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를 '아빠츄리닝'으로 연관 지어 외웠던 기억이 있다. 아빠츄리닝은 기회라는 의미와는 상관없었지만 그 발음이 너무 재밌고 당시에 우습게 느껴져서 스펠링까지 어렵지 않게 외웠던 기억이 있었다. 정말 살아오면서 '기회'라는 영어단어를 사용할 일이 참 많았는데 참 유용하게 써먹었었다.
그렇게 특별히 대단하지도 우아하지도 않은 시간을 보냈던 고등학교 2학년 때를 보냈었는데 무슨 자신감으로 한 그룹의 리더를 하겠다고 남들 앞에 서서 반장 선거 때 연설을 하며 뽑아달라고 자신감 있게 말했던 것인지, 그리고 그 모습을 믿음직스럽게 생각해주고 믿어줘서 결국 반장을 될 수 있게끔 해 줬던 친구들이 고마웠다.
목소리가 작아 내 의견을 쉽사리 내지 못했고 남들 앞에 서서 하나의 장 으로써 팀을 이끌 용기도 없던 내게 있어 그저 성실하다는 이유로. 전교에서 반장들 중 성적이 제일 낮아서 항상 성적으로 잘려나갔던 성적 대비 우열반 중 우 반에 들어가 본 것도 한 번 정도 있을까 말까 했던 그 시절 나도 모르게 가슴속 묵혀 있던 말을 꺼내게 됐었다.
'나, 반장 해보고 싶어. 반장 잘할 수 있어. 믿어줘.'
인생은 참 신기하다. 나도 모르게 용기를 얻고 나도 모르게 자신감을 얻어 당당한 사람이 되어 인생의 우거진 숲을 헤쳐나가고 있다. 숲이 우거지고 길이 울퉁불퉁해도 걱정이 없고 앞으로 나아갈 일은 문제가 없다며 자신감 있게 밀고 나간다. 인생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변화를 찾게 되고 그 변화 속에서 스스로 변하는 모습을 보며 감동을 느끼고, 감탄을 느끼기도 한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변화해나가고 싶다는 생각.
굳게 닫힌 입이 열리는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