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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 DEN Oct 31. 2020

#4. 망설이다가


때는 겨울이었다.

서울 정릉의 산동네 허름한 집에 취업을 준비하던 나는 청년백수였다. 

보일러가 없는 5평쯤 되는 방에는 중고장터에서 구입한 싱글 침대가 있었고,

의자 위에는 빨간색 빛을 내는 전기난로가 놓여 있었다. 


부엌에는 가스레인지와 냄비가 두 개 있었는데 큰 냄비는 물을 끓여 춥지 않게 몸을 씻는 용도였고, 

작은 냄비는 라면을 끓여 따뜻하게 뱃속을 채우는 용도였다. 


그날도 그랬다. 

추운 몸을 녹이려 라면 하나를 끓여 먹고서는 이불속으로 들어가 

입김 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내 청춘이 어찌 될지 꿈뻑꿈뻑 생각하는 중이었다. 


딱히 이날만 유별나게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벌써 몇 날을 이렇게 보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어떤 날은 미래가 밝았고, 어떤 날은 암울했다.


나름의 계획도 세워보고, 자료도 수집해 보았지만 

나는 여전히 무엇을 하고 싶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구인광고를 통해 적당한 회사를 찾았어도 이력서를 넣을지 말지를 고민했고, 

만약에 입사가 된다 해도 그 일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걱정했다. 


이제 갓 졸업한 애송이 청년에게 첫 사회생활을 준비하는 일은 고민과 망설임의 연속이었다. 

출발할 마음은 있지만 시작점을 찾지 못해 어물쩡거리는 상태.

아마도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보았을 경험이 아니었을까.


그로부터 20여 년이 훌쩍 지나 청년은 어엿한 중년이 되었고, 

여전히 많은 선택들 앞에서 고민하고 망설이지만 이제는 어물쩍 시간만 보내지는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것을 “해야 하는 이유’를 찾아 나서는 편이다. 


망설임은 두려움에서 비롯된 우유부단함이다. 

그것은 곧 게으름이 되고, 낮은 자존감이 된다. 

즉,“망설임”이 길어져 숙성이 되면 그것은 “후회”가 되는 것이다. 


망설임은 무언가를 시작하기 전의 시점이고, 서투름은 무언가를 시작하고 난 뒤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서툰 것은 시작을 하고 나서 고민해야 하는 문제다. 

그것이 시작을 가로막게 둔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도 시작도 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나에게 있어 중요해 던 선택들에는 대부분 그만한 이유들이 있었다. 

취업이 그랬고, 결혼이 그랬다. 퇴사를 했을 때도, 혼자 일해보기로 마음을 먹었을 때도 그랬다.


그 이유들이 반드시 실용적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마음이 가는 일이거나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그것을 이유로 삼으면 그만이다. 


나는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통해 “망설임”보다 “시작”을 선택하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툴다’는 것은 무언가를 이미 시작했다는 뜻이다.

일단 시작이 되면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서툰지를 금방 찾을 수 있다. 

아픈 곳을 찾아야 적절한 처방이 되듯이 서툰 곳을 찾으면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 

서투르다는 것은 시작했다는 뜻이고, 그것은 매우 로맨틱한 일이다. 

청년백수가 밥벌이를 하는 어엿한 어른이 되어가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든든한 남편이 되어가고, 

선물 같은 아이를 키우는 건강한 아빠가 되어가는 것에는 결국 서툴렀던 시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시작은 망설여진다. 

아마도 그건 시작하려는 무엇 때문이 아니라 떠듬떠듬한 내 모습을 나에게도 다른 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동안의 나는 여러 번을 서툴렀고, 그것들을 반복하며 지금만큼 성장해 왔다는 것을 

나는 부인하지 못하겠다. 


내 나이 37에 첫 선을 그어 그림을 그렸었다. 

그리고 지금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일로 밥을 벌어먹는다. 

서툴고 못난 그림이었지만 만약 그때에 첫 선을 그어내지 못했다면 

지금껏 그림을 그리며 알게 된 수많은 깨달음과 다양한 기회들과 

즐거운 경험들을 맛볼 수 없었으리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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