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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래 Dec 04. 2023

8월, 파리

안녕하세요, 한 달짜리 파리지엔느예요 2


미리 밝히지만, 맥주 중독은 아니다.




에펠탑이 잘 걸려있나 확인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집 앞 긴 계단을 내려가 센느 강을 가로지르는 철다리 앞에서 버스를 타고 마레 지구에 있는 발레 학원에 갔다가 수업을 듣고 걸어서 집에 돌아오면 가장 먼저 캔맥주를 냉동실에 넣어놓고 가볍게 사워를 한다. 오늘 저녁은 샐러드 파스타다. 전날 슈퍼마켓에 들러 생모차렐라 치즈와 토마토를 사놓은 참이다. 마침 싱싱한 토마토 한 봉지가 세일 중이었다. 빠르게 푸실리 면을 삶고 재료를 다듬는다. 

동글동글한 모차렐라 치즈 한 움큼, 무심하게 썬 토마토, 손으로 찢은 로메인, 마른 바질, 후추 툭툭, 소금 두 꼬집, 발사믹 휙, 올리브유 아주 많이. 

한데 섞어 그릇에 담으면 끝이다. 마지막으로 냉동실에서 맥주를 꺼낸다. 캔 표면에 성에가 꼈다. 

치익 - 

와인잔에 따르자마자 살얼음이 후루룩 떨어져 동동 떠올랐다.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저녁 만찬 시간이다. 



The Paris Supper



파리에서 가장 많이 간 곳을 꼽으라면 슈퍼마켓이 단연 선두를 차지한다. (1위는 어쩔 수 없이 센느강이다.) 언제부턴가 창문 너머 에펠탑에 보이는 곳을 '집'이라  칭하기 시작했는데 가족이나 친구와 전화 통화를 할 때 '응, 에펠탑 보고 집 가는 중이야'라고 대답한다거나 일기를 쓸 때도 '미술관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중에 먹은 크루아상'이라고 표현했다. 정말 파리지엔느가 된 것처럼. 


첫날 에펠탑 여운에 젖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가까운 마트를 찾았고 우리나라 하나로마트와 비슷한 체인점이 나왔다. 옆에서 옷도 팔고, 약국 화장품도 파는 곳이었다. 현지 마트 들르기는 여느 여행과 다름없는 일정이었지만 단순히 포장지나 신기한 과일, 채소 따위를 구경하는 과거의 여행과 단연 달랐다. 왜냐? 난 파리지엔느란 말이다! 게다라 짧더라도 파리에 사는 사람으로서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직접 장을 보고 만들어 먹어야 했다.

'신선한 재료, 평소 잘 만날 수 없던 다양한 치즈를 종류별로 사서 매일 집에서 요리하는 거야.
줄리아 차일드처럼.'


파리 여행을 계획하며 장을 보고 요리할 생각에 얼마나 설레던지 돈 아끼자고 간 슈퍼마켓에서 가장 많은 지출을 하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을까! 기분 탓이겠지만, 토마토는 때깔이 더 고왔고 치즈, 햄, 잼, 버터는 종류가 다양했다. 뭘 사야 할지 혼란이 올 정도였다. 치즈만 해도 브리, 고메, 에멘탈, 모차렐라, 블루 그리고... 한숨에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브랜드가 서너 개는 족히 되었다. 가뜩이나 환율과 유로 계산도 익숙하지 않은데 종류까지 많으니 초반에는 장 보는 게 미술관 관람과 맞먹었다. 핸드폰과 제품을 번갈아 바라보며 브랜드의 신뢰성과 가격의 합리성을 따졌는데 나중엔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더라. 그래서 그냥 마음이 끌리는 대로 골라 넣었다. 그냥 다 카트에 던져 넣고 '남으면 싸가지 뭐' 사치를 부렸다.


기본적인 조미료와 소스, 파스타면 등 적어도 일주일 치 저녁 메뉴를 결정해 버렸고 여기에 프랑스산 맥주까지 더해져 커다란 종이백 2개가 가득 찼다. 찢어지기 직전인 종이백을 아슬아슬 곡예하 듯 들고 집 앞까지 무사히 도달한 순간 부욱 - 맥주가 든 종이백이 찢어졌다.


다음날 마트 입구에서 두 번째로 종이봉투가 찢어졌고 왔던 길을 돌아가 천으로 된 장바구니를 샀다. 크루아상을 4개는 사 먹을 수 있을 정도의 가격이었지만 강렬한 빨간 색상이 마음에 들어 마트 쇼팽용인 장바구니를 매일 가방 삼아 파리 곳곳을 줄기차게 들고 다녔다. 아마 지금도 본가 베란다에 겹겹이 쌓여 있는 상자 어딘가에 틀어박혀 있을 것이다.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는 일은 돈을 아끼기 위해, 파리에 녹아들기 위해 내린 선택이지만 아주 만족스러웠다. 매일 보는 계산대 직원과 눈인사를 주고받았고 카트를 밀고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진짜 파리지엥과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는 여유도 생겼다. 마침내 카드를 쓰기 시작했다. 지갑 속 우수리돈을 다 쓰고 나선 수수료 걱정(얼마 하지도 않더라) 없이 카드를 긁었다. 덕분에 재미있는 일화도 생겼다.


매일 먹는 집밥에 질려 하루는 아침 일찍 일어나 집 앞 사거리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아침엔 에스프레소와 크루아상이 세트 상품으로 2유로에 판매된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바에 앉아 주문하려는데 멈칫, 이미 모든 바자리엔 크루아상이 놓여 있었다. 에스프레소는 주문하려고 손가락을 든 순간! 마치 내 마음을 읽어 미리 커피를 내린 것 마냥 아주 빠르게 나온다. 어서 먹고 빨리 사라지란 이야기다. 물론 메뉴 구성 자체가 그런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나는 아침을 느긋하게 즐기기 위해 갔으니 편안하게 테이블 자리에 앉아 노트를 펴고 (그들도 신문을 읽고 담배를 피운다) 아침 일기를 다 쓰고 일어나 카드를 내밀었다.

"계산해 주세요."
"안 돼요. (non!)"

농. 안 돼요. 돌아온 건 단호한 얼굴과 손가락이었다. 이번엔 프랑스 할아버지였다. 카드를 받지 않는단다. 

‘제가 저기 살아요. 내일 드릴게요.’ 아니면 ‘이따가 갖다 드릴게요.’ 어쩌지?


그때 할아버지는 맞은편 횡단보도 벽 쪽을 가리켰다. 나고 자란 한국을 벗어나 여행을 다니며 신기했던 점 중 하나는 건물 벽에 ATM기가 박혀 있다는 사실이다. 365일 부스가 있는 것도, 청원 경찰이 지키는 안전한 은행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다리 없이 아주 조그마한 몸통만 외부에 노출되어 있는 광경은 생소했고 과연 저기서 진짜 돈을 찾을 수나 있을지 궁금했다. 할아버지는 뒤돌다가 강도 맞을 것 같은 그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저기서 돈을 뽑아오라고? 아니 수수료가 더 들 것 같은데?’


무전취식을 했다가 파리 경찰에 붙잡혀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울며 겨자 먹기로 신뢰가 전혀 안 가는 ATM 기계로 향했다. 복제기나 소형 카메라가 달려있지는 않을까 두려웠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다가가 작은 화면을 어떻게든 가려보려고 몸을 부풀려 10유로를 뽑아 겨우 아침값을 지불했다.

'수수료도 드는데 이왕 뽑을 거 많이 뽑아서 커피랑 크루아상이나 왕창 사 먹자.'


파리는 나의 드림 여행지였지만 내심 불안했을 것이다. 그때는 인정하기 싫었지만 일상이 구축되지 않은 낯선 곳에서 긴 시간을 보내는 일은 어렵다. 때론 고역이기도 하다. <생각하는 사람>, <수련 연작>을 보고 와도, 발레 수업을 듣거나 쇼핑을 하고 나서도 늘 뭔가가 필요한 것만 같은 기분에 슈퍼마켓에 들러 토마토 한 묶음이라도 빨간 장바구니에 넣어 와야 하루를 마무리했다. 아마도 안정감과 소속감을 찾아 그곳을 갔을 것이다. 그래서 이틀에 한 번 걸러 마트에 갔다. 파리에서 내가 만든 일상. 평범하지만 행복한 하루, 파리의 일상에 나는 완전히 빠져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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