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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래 Nov 27. 2023

8월, 파리

안녕하세요, 한 달짜리 파리지엔느예요 1


끝끝내 에펠탑에 오르지 못했다.

그래서 파리에 다시 가야 한다.


발레 학원에 가기 전, 냉동실에 맥주 1캔을 넣어두고 수업이 끝나면 센느 강변을 따라 걸어서 집에 돌아온다. (....)



에펠탑은 파리 어디서나 눈에 들어왔다. 살아생전 에펠탑을 질색하며 싫어했던 모파상은 에펠탑 안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고 전해진다. 식당에 앉아 있으면 에펠탑은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 서있는 에펠탑이 싫어서 그 안에 들어가 식사를 하다니 얼마나 아이러니 한가! 이쯤에서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 처음엔 우뚝 솟은 고철덩어리가 싫었을 테지만 지어지고 난 뒤의 모습을 보고 나니 마음이 바뀌었던 게 아닐까? 고고한 작가로서 말을 뒤집을 순 없으니 에펠탑 안 식당에서 밥을 먹어야 한다는 묘수를 둔 것이다. 평생 에펠탑에 들어갈 수 있도록.




파리에 도착한 첫날, 트로카데로(Trocadéro) 역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이쯤에서 에펠탑이 보여야 했다. 모파상이 살던 시대와 다르게 5층이 훌쩍 넘는 건물들이 많이 생겼고 에펠탑은 파리 어디서나 보이는 흔한 장면이 아닌 아주 비싸고 귀한 뷰가 되었다. 에어비엔비 집주인이 대문짝만 하게 홍보하던 에펠탑 뷰는 건물 사이에 가려졌는지 보이지 않았고 혹시 사기당한 건 아닌지 불안해졌다.

'숙소 창문에서 에펠탑이 보인다더니.. 거짓말 아니야?'

한 달 치 짐이 든 캐리어를 드르륵드르륵 - 끌고 보도블록을 걸으며 눈은 에펠탑만 찾았다.

"찾았다!"

나도 모르게 외마디 탄성이 나왔다. 보일 듯 말 듯 꼭대기가 삐죽 나와있었다. 에펠탑이라니. 숙소로 향하는 내내 비싯비싯 미소가 새어 나왔다.



창문에 에펠탑이 걸려있었다. 비현실적인 광경에 선뜻 방 안으로 들어서기가 어려웠다. 문간에서 머뭇거리다가 크게 심호흡을 하고 한 발 내디뎠다.

'에펠탑이 내 방 창문에 걸려있다니!'

커다란 창문을 여니 자그마한 발코니가 보였고 오른쪽 귀퉁이로 절묘하게 에펠탑이 걸려 있었다. 하루 종일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침에 에펠탑을 보며 잠에서 깨어났으면 좋겠어.

무려 한 달을 묵을 거라 고심해서 숙소를 골랐다. 어린 시절 동화책을 읽을 때면 주인공은 늘 2층집 창문이 있는 방에 살았고 창문을 통해 푸른 들판이나, 등대 혹은 그린 게이블스의 아름다운 들판이 펼쳐진 창문에 기대 억울한 일도 삼키고, 사랑에 설레고, 엄마를 그리워하곤 했다. 내게도 한 달 한정이지만 창밖을 보며 울고, 웃고, 화내고, 슬퍼할 풍경이 생겼다.


어느 주택가에 있는 이 스튜디오는 절묘하게 에펠탑을 담고 있었다. 파리 아파트는 전부 오래되었기 때문에 내부에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곳도 많고 미로처럼 꼬여 있어서 커다란 철문을 열고 내 집을 찾기까지 한참 걸린다. 초행길이라면 익숙하지 않은 구조 때문에 더욱 힘들 것이다. 나 역시 남프랑스에서 시작한 기나긴 기차 여행과 오래된 파리 지하철 역에서 캐리어를 들고 옮기느라 두배로 힘들었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당장 에펠탑을 보러 가야 했다.



길을 몰라도 괜찮다. 헷갈릴 땐 시선을 들어 에펠탑 위치를 확인하며 찾아가면 된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신중해졌다. 물론 앞으로 질리도록 (과연 질렸을까) 에펠탑과 마주하겠지만 첫인상은 마지막일 테니 일부러 바닥을 보고 걸었다. 제대로 내 눈앞에 나타났을 때 온전한 모습을 담고 싶었다. 어떤 기분으로 어떻게 그곳까지 갔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설레던 기분은 선명하다. 문학 시간 고전 소설에 나오던 '사랑하는 이 옷깃만 스쳐도 심장이 널뛰는 느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젊은 시절, 그대가 파리에서 살아보는 행운을 누렸다면
그 후 세상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든,
파리는 이동하는 축제처럼
남은 생 동안 그대 곁에 머물 것이다


머릿속에 수십, 수백 번 그렸던 에펠탑은 웅장했다. 고개를 아무리 꺾어도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분명 그 정도로 높지 않을 테지만 당시 내 눈엔 그 어떤 건축물보다 커다랗게 보였다. 나는 곧바로 로맨틱한 무드에 젖어 아련하게 에펠탑을 바라봤다. 끝이 뾰족한 철탑이 내게는 부드러운 곡선의 하트로 보였다. 차갑고 딱딱했을 철탑은 시간이 흘러 비바람을 맞아 구릿빛으로 녹슬었지만 세월을 입은 명품처럼 더욱 멋져 보였다. 때론 공간 그 자체로 목적이 성립된다. 커피를 마셔야 한다거나, 책을 읽어야 한다거나, 어딘가에 기록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기 전에 공간에 도달하는 순간 목적이 이뤄진다. 파리, 에펠탑.


에펠탑 아래에 돗자리를 깔고 피크닉을 즐기고 싶었지만 준비되지 않은 빈손이었다. 로망이란 철저한 준비를 바탕으로 이뤄지는 법이며 난 빈털터리로 갔으니 당연히 로망을 추구할 자격이 없었다. 뾰족한 탑을 뒤로하고 잠시 공원을 벗어나 빵집을 찾았다. 우리나라에서 쉽게 카페를 찾듯 파리에서는 빵집이다. 잘 몰라도 줄이 길게 늘어선 빵집이 보였고 홀린 사람처럼 꼬리를 물었다.

뭐지? 뭘 먹어야 하지?

마음을 정하지 못했는데 벌써 계산대 직전이었다. 일단 크루아상과 파이를 골랐다.

"00유로"

얼굴에 자잘한 주름이 자글자글한 프랑스 할머니가 무뚝뚝하게 가격을 이야기하며 손을 내밀었다. 익숙하지 않은 동전 모양에 허둥거리며 열심히 세어봐도 1유로가 모자랐다.

아?

허둥거리며 쳐다보니 주름 하나하나 독촉을 담아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저... 1유로가 부족해서요."

순간 당황해서 할머니에게 돈이 부족하다고 말해버렸다.

'앗, 깎아달라고 알아들었을까?'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생각이 미치자 더욱 당혹스러웠다.

"이건 뺄게요."

중얼중얼거리더니 크루아상을 거칠게 내려놓고 파이를 포장하더니 휙 - 내밀었다. 그땐 몇백 원 수수료가 아까워 감히 카드 쓸 생각을 못했다. 약간 창피하고 억울한 마음이 들었지만 뭐, 에펠탑 보고 풀어버리면 되지. 낯선 곳에서 나는 너그러워졌다.


공원 벤치는 이미 만석이었다. 고개를 위로 들어 한눈에 에펠탑이 들어오는 자리에 그냥 털썩 앉았다. 주변 누구도 돗자리를 깔고 우아하게 샴페인 잔을 부딪히는 사람은 없었고 대충 푹신한 잔디와 나뭇잎에 드러누워 8월의 햇살을 만끽하고 있었다. 나도 그 무리에 합류했다.




에펠탑을 구석구석 훑고 난 뒤 내게 닿는 햇살이 너무 좋아 어쩌면 내 피에 햇살이 흐르고 있는 건 아닐까 상상했다. 살갗이 따뜻하게 데워지며 아드레날린이 치솟았다. 몸속 구석구석 모든 세포가 날뛰었다. 빵집에서 사 온 파이는 거대한 에그타르트 같았다. 반질반질 윤기 나는 코팅 아래에 갇힌 샛노란 크림, 몽글몽글한 커스터드 크림이 가득했고 과자 같은 파이 시트가 바삭하게 씹혔다.

'맛은 있네'

비좁은 마음에 아직 앙금이 남았던 모양이다. 나도 모르게 콧방귀를 뀌며 파이를 삼켰다. 감상에 젖어 멍 때리는 동안 침입자가 합류했다. 다리를 타고 기어 왔는지 파이에 개미가 붙어있었다.

'파리개미와 디저트를 쉐어 당하다니 영광이잖아!'


사실 아주 조금 외로웠다. 혼자 하는 여행에 장점만 있다곤 못하겠다. 이 풍경과 나를 함께 기억해 줄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미치면 불현듯 입안이 쓰다. 으쓱 - 뭐 어쩌겠는가 혼자인걸



파리에 다녀와서, 꿈꾸던 곳들을 눈으로 보고 와서 내 삶에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었다. 한 달 동안 아무도 나를 모르는 낯선 곳으로 떠나 평소라면 해보지 않을 법한 시도와 도전을 하고 눈치 보거나 타인의 시선과 평가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나와 마주했다.


내게 여행이란 낯선 일탈이 아니다. 첫인상이 낯설 순 있으나 나는 여행지에서도 일상을 구축하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책을 읽고, 커피를 내리고, 산책에 나섰다가 돌아와 점심을 만들고, 하루 한 곳 점찍어 둔 곳으로 탐방을 나선다. 평소 하고 싶었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놓치고 살았던 일상과 행복이 낯선 여행지에서는 가능해진다. 거기서 나는 더 여유롭고 친절하며 꽤 괜찮은 인간으로 변모한다.


당연히 파리에서도 일주일 만에 익숙해진 탓에 더 이상 여름의 햇살도 내 방 창문도 감사할 줄 모르는 고약한 원래의 나로 돌아왔지만 밤이면 정각마다 반짝거리는 에펠탑에 넋을 읽고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곤 했다. (알코올 영향이 컸다.)


'아, 나 지금 파리야.'

어째 보면 모든 일이 그렇다. 처음엔 감사하던 존재도 익숙해지면서 우리는 초심을 잃는다. 그럴 때 여행을 떠올리자, 가장 행복했고 순수하게 경외감에 몸을 떨던 여행자의 첫인상과 그곳에서 구축했던 일상을.  하루가 더욱 아름다워질 것이다. 파리와 에펠탑을 떠올리는 이 순간조차 내 눈가가 시큰거린다.


일부러 창문에 비친 에펠탑을 바라보기도 했다.



<한 달짜리 파리지엔느의 일상>

2편 슈퍼마켓

3편 미술관

4편 발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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