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스에서(le premier)
아무리 피곤해도 그날, 도시에서 있었던 일은 바로 기록해야 직성이 풀린다. 길을 걷다가, 공원 벤치에 걸터앉아 노트를 꺼내 지금 풍경이 어떠한지, 주변 사람은 어떤 옷을 입고 있는지, 공기 중 냄새가 어떤지 그리고 그에 따른 내 기분이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적어 내려간 후에야 엉덩이를 떼고 다시 걷는다. 일종의 강박증 같은 거라 이렇게 하지 않으면 불안하다. 그나마 주로 혼자 여행하기 때문에 공원이든 카페든 길거리에서든 시도 때도 없이 노트와 펜, 어쩔 때는 영수증이나 주머니에 쑤셔 넣어 둔 냅킨을 꺼내 끄적거릴 수 있었다.
나는 ‘순간’이라는 단어를 아주 좋아한다. 그곳에서 순간을 기록하면 도시의 냄새, 활기, 햇살이 흰 종이에 베어 들기에 일상으로 돌아가더라도 종이를 펼쳐 들면 여행하던 특정 순간으로 다시 돌아간다. 사실 함께하는 여행에선 마음대로 주저앉아 펜을 꺼내들 순 없다. 답답하지만 상대방에게 무례한 짓이니. 어쩌면 동행을 탓할 아주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한다. 비가 내려 일정이 엉망이 되어버리고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못한다면 ‘너 때문에 이번 여행은 날아가버렸어! 글에 생동감이 없잖아!’라며 온갖 짜증과 책망을 던지고 책임을 회피한다.
그냥 나쁜 년이다.
여름 유럽은 찬란하다. 반짝거리는 공기와 생기 넘치는 거리는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종류의 쾌적하고 충만한 계절이다. 신의 은총 같은 햇살이 나를 관통하면서 새로운 에너지가 차오르고 어디든, 얼마든 걸을 수 있다는 무모한 용기가 차오른다. 첫여름 유럽을 경험한 이후로 내게 여름 유럽은 늘 반짝거리는 물방울 같은 곳이었지만 슬프게도 8월, 니스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반기절 상태였다. 하필 일생일대의 꿈을 이루기 직전 감기에 걸려버린 것이다. 자기 관리를 못한 바보 같은 본인을 원망하는 수밖에. 2차례의 기내식을 건너뛰고 불편한 이코노미 석에 몸을 구겨 넣은 채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고 니스 공항에 도착해서도 한참을 헤롱거리며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헤매었다. 니스의 블루해변 근처에 에어비앤비로 숙소를 잡았는데 설상가상으로 집주인과 연락이 닿지 않았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왔던 길을 두세 차례 돌아갔다가 겨우 니스 공항 근처 #I LOVE NICE 조형물을 지나 트램 정거장으로 향했다.
여름 니스의 태양이 트램의 큰 창문을 타고 내게 닿았다. 몸 상태가 정상이었다면 싱글벙글하며 비행기에서 받아 주머니에 쑤셔 넣은 냅킨을 꺼내 길거리 간판이라도 적었을 테지만 불행히도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손가락으로 누르며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지만 그토록 동경하던 도시, 좋아하는 계절의 반짝거리는 유혹도 내 시선을 끌지 못했다. 길거리 가득 가벼운 차림의 행복한 피서객들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 속에서 나는 트램 안 유일한 승객이었다.
어찌어찌 트램을 타고 에어비앤비 아파트를 찾아갔다. 집주인 Emma는 신경질적인 중년의 프랑스 여성이었다. 그녀가 친절했을 수도 있다.(기억이 분명하지 않다.) 단지 서로 첫인상이 썩 좋지 않았고 나는 나대로 아파서 제정신이 아니었으며 Emma는 나와 연락이 닿지 않아 걱정하던 마음을 히스테릭하게 표현했을 것이다. 대충 인사를 하고 내게 배정된 방으로 들어가 그대로 침대에 무너지듯 몸을 던졌다. 짐도 풀지 않고, 씻지도 않고, 뭘 먹을 정신도 없었다. 몽롱한 기분에 빠져 어렴풋이 누군가 문을 열고 나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점심 늦게 도착한 투숙객이 좀처럼 밖으로 나오지 않자 방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 궁금해진 집주인이 들어왔던 모양이다. 온전히 맑은 정신으로 몸을 일으켰을 땐 이미 방안으로 어둠의 그림자가 스멀스멀 기어 오고 있었고 테라스에 너머 진한 구름이 느긋하게 서쪽으로 흘러가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첫인상이 별로였는지 Emma는 내게 퉁명스러웠다. 나중에 풀어놓겠지만 끝까지 엉망이었던지라 혹여 안 좋은 말이 쓰여 있을까 봐 무서워 아직도 에어비앤비 후기를 읽지 않았다. 흠, 흠, 겁쟁이처럼 보여도 어쩔 수 없다. 클릭했을 때 욕이라도 쓰여 있으면 그날 하루종일 기분이 바닥을 기어 다닐 것 같단 말이다! 그렇지만 나도 보통내기는 아니다! 시크한 표정으로 현관문을 빠져나와 느긋하게 근처 카페로 향했다.
CAFE FREI 니스보다 쿠바를 연상케 하는 곳이었다. 늦은 오후라 한가했는지 보통 아침이나 점심엔 사람이 붐비는 인기 식당/카페였다. 니스에 머물면서 3일 내내 아침 출석하며 알게 된 사실이다. 창밖으로 니스 거리를 바라보며 점차 현실로 동기화되었고 차차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여기 니스야’
덩달아 뱃속이 요동쳤다. 신선한 오렌지를 착즙 한 샛노란 주스, 손바닥 만한 바삭한 크루아상, 고소한 라테 세트를 주문했다. 아, 초코맛까지 크루아상 2개다.
테라스로 나가 도시의 여름을 더 자세히 보기로 했다. 카페 앞엔 바다 쪽으로 향하는 횡단보도가 있어 사람들을 관찰하기 딱이었다. 물놀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인지 챙이 넓은 플로피햇을 쓰고 커다란 선글라스를 낀 멋쟁이들이 새 빨개진 피부를 자랑하며 맞은편에서 걸어왔고, 어느 나라나 아이들은 지치는 법이 없는 모양인지 잔뜩 지친 부모 옆으로 신나게 떠들며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excusez-moi"
메뉴가 나왔다. 투명한 유리컵에 담긴 샛노란 오렌지 주스를 보자 입안에 저절로 침이 고였다. 횡단보도에서 눈을 떼고 잠시 식사에 집중하기로 했다. 꿀꺽. 한 번으론 부족한데. 꿀꺽 꿀꺽. 손안에 가득 찬 유리잔이 이렇게 작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excusez-moi, un jus d'orage de plus s'il vous plaît."
비어버린 유리컵에 미련이 남아 (어쩔 수 없이) 한 잔 더 주문했다. 오렌지 주스 한 잔 더요!
크루아상에 댄 나이프를 타고 바삭함이 느껴졌다. 에라 모르겠다. 손으로 크루아상을 집어 한입, 라테에 푹 찍어 다시 입에 쏙 넣었다. 비행의 피로도 함께 사라졌다. 느긋하게 식사하며 횡단보도 너머 한 블록 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Blue Beach를 상상했다.
'남프랑스의 쪽빛 바다예요.'
대학교 교양 수업에서 본 바다 사진과 ’ 쪽빛‘이란 단어에 꽂혀 프랑스 여행을 계획한 게 벌써 8년 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