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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래 Nov 20. 2023

여름, 유럽

니스에서 (le deuxième)

니스에서 길을 잃었다



나는 자율전공학부로 대학에 입학했다. 그것도 이과 자율전공학부. 세포의 나노 단위까지 문과이거늘 이과로 들어온 내게 대학은 세상에서 제일 지루하고 재미없는 곳이었다.

'왜 음식의 맛과 모양을 언어로 논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도 않는 분자 구조를 따지고 영양소를 외워야만 하는 거지?'

전공보다 교양 수업을 많이 듣던 신입생은 2학년 1학기 교양 필수 학점을 꽉 채우게 되었다. 그리고 3학년 1학기, 전과했다.


"왜 전과했어요?"


누구에게도 밝힌 적 없는 전과 이유를 여기서 밝히려 한다. 당시 나는 이렇게 답하곤 했다.

"제가 언어에 관심이 많아요. 프랑스어는 세계 공용어이기도 하고 국제기구 취업할 때도 도움이 되죠.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 한 뒤 국제기구 입사를 꿈꿨다.) 라틴어에 뿌리를 두고 있는 (너무 흰소리라 중략) 게다가 프랑스 문화는 너무 매력적이잖아요."

전과한 진짜 이유는 내가 발레에 미쳐있었기 때문이다. 전공생과 같은 마음가짐으로 주 4회 이상 발레 수업을 다니면서 발레 용어를 더 잘 알아듣고 싶었고, 프랑스 발레 역사와 문화를 파고들고 싶었다. 언젠가 파리 가르니에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을 보고 무용수들을 만나 불어로 말을 걸고 싶었다. 팬이라고, 춤을 어쩜 그리 잘 추냐고.


발레에 미쳐있던 나는 신입생 수업을 듣는 3학년이 되었다. 영어나 일어 만만치 않게 불어도 고수는 많았다. 어릴 때 부모님을 따라 캄보디아에서 중학교 과정까지 수료했다는 친구는 원어민 수준의 불어를 구사하며 원어민 교수와 자유롭게 대화를 나눴고 수능을 친 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어린 친구들은 불규칙 변형, 1군, 2군, 3군 동사를 척척 외웠다. 그 안에서 나는 겨우 졸업했다. 지금도 어떻게 DELF B1을 딴 건지 의문이다.


매년 5개씩 새해 목표를 세우는 데 그중 '프랑스어 공부'는 디폴트 값이다. 매년 유일하게 지키지 못하는 목표란 소리다. 어쨌든 내 숙적과도 같은 불어지만 프랑스 여행할 때만큼은 불문과 졸업생으로 불어에 심취해서 괜히 웅얼거리며 불어를 했다. 하루는 동생 선물을 사러 파리의 라파예뜨 백화점엘 갔는데 추임새를 넣어가며 고개를 끄덕이는 내게 속사포로 설명하던 프랑스인 직원이 멍한 내 표정을 보고선 영어로 이렇게 묻기도 했다.

"Do you... speak french?"(너, 불어 하는 거 맞아..?)

당연히 절반도 못 알아 들었다.


발레에 열광하던 여대생은 불어불문과로 전과했다.


오렌지 주스를 2잔 마신 날, 나는 바다를 보지 않고 숙소로 향했다. 아주 오랫동안 꿈꿔온 장소에 이렇게 엉망인 몰골로 향할 순 없었다. 대신 쭉 뻗은 길을 따라 봐도 봐도 질리지 않을 것 같은 니스의 거리와 건물을 구경했다. 발코니가 아주 멋진 프랑스의 아파트를 올려다보며 마침 발코니 문을 열고 나온 파란 눈의 곱슬머리를 한 아주 멋진 청년과 눈이 마주치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청년은 내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신혼여행지로 니스도 나쁘지 않겠어.'

머나먼 혹은 발생하지 않을 미래를 상상해 봤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는 니스 여행은 어떨지.




오른쪽, 왼쪽,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며 걷다 보니 마트가 나왔다. 다른 나라를 여행하며 만나는 가장 큰 재미 중 하나는 동네 마트이다. 우리와 다른 포장지, 가격, 단위, 채소 모양까지 나는 어디를 여행하든 첫날 혹은 마지막 날 반드시 동네 마트를 찾는다. 과자 코너를 한참 구경하다가 소금이 들어가 있다는 캐러멜 초콜릿을 골랐다. 지갑 속 동전을 골라 계산했다. 동전으로 계산해 본 게 얼마만인지. 팔뚝만한 초콜릿을 뚝뚝 끊어먹으며 계속 걸었더니 숙소에 도달했을 무렵 은박지만 남아버렸다.


3일 동안 니스의 날씨는 완벽했다. 새파란 하늘, 반짝이는 햇살, 쾌청한 습도, 여행자라면 바라는 날씨가 연일 이어졌고 나는 니스의 바닷바람을 맞으며 발바닥이 닳도록 걸어 다녔다. 신기하게도 소금기가 없어 바람은 끈적거리지도 비리지도 않았다. 간간히 부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가볍게 살랑거렸고 내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하고 충만했다. 비키니를 입고 해변가에 나란히 누워 태닝 하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수평선으로 시선을 들었다. 여전히 꿈같았다. 오래된 나의 꿈에 대한 예의를 차리기 위해 난 꽃무늬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빨간색 립스틱도 바른 참이었다.





새파란 바다와 내리쬐는 태양에 반짝이는 블루비치의 윤슬 덕에 눈이 시려 눈가가 시큰거렸고 이내 물기가 고였다. 행복했지만 허무함, 막막함 불한함이 동시다발적으로 하늘로 떠오르다 만 비눗방울처럼 공중에서 터지고 말았다. 꽤 오랜 시간 나는 공부하다 포기하고 싶을 때, 일하다가 그만두고 싶을 때, 힘들 거나 슬픈 일이 있을 때 이곳을 목표로 달려왔었다. 목표를 이뤘지만 이젠 목표가 사라진 셈이다.

'나는 이제 어쩌지? 무엇을 목표로 나아가야 하지?'


쪽빛 바다를 놓고 다시 달려갈 다음 목표를 고민하는 꼴이라니, 스스로에게 질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손은 이미 가방을 뒤지고 있었다. 노트와 펜을 꺼내 들어 뭐라도 적으며 이 불안하고 허무한 구멍을 채워야 했다. 공원에 앉아, 플리마켓을 구경하다가, 니스 성을 힘겹게 오르다가 문득 불안해졌다. 그럴 때면 나는 습관처럼 쓴다. 휴지, 냅킨, 영수증 뒷면 가릴 것 없이 급한 대로 들고 간 책 맨 뒷 쪽 빈 공간에 뭐라도 적는다. 한 번 이런 생각이 들자 어서 니스를 떠나 파리로 가고 싶었다. 꿈보다 더 큰 동경을 쫓아 현재를 즐기지 못하고 파도에 떠밀려가는 바보처럼 어서 저 커다란 파도에 쓸려 다른 곳으로 딸려가고 싶었다.



니스 성을 걸어서 오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무 생각 없이 구시장에서 구불구불한 계단을 따라 걸어서 니스 성에 올랐다.



배가 불러 아무 생각이 들지 않도록 많이 보고 많이 먹었다. 아침엔 CAFE FREI의 아침 정식을, 점심엔 니스 바다를 보며 피자나 샌드위치 따위를, 저녁엔 파스타와 맥주를 섭취했다. 한 달가량 프랑스를 여행하며 몸무게가 3kg 넘게 불었다. 그럼에도 종종 불안이 몰려왔고 아름다운 여름의 니스와 나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마지막 날, 샤갈 박물관을 찾았다. 니스에 샤갈의 흔적이 있는지도 몰랐던지라 TGV역으로 향하기 전 변경한 예정에도 없던 일정이었다. 샤갈은 내가 철들기 훨씬 이전부터 좋아했던, 나의 첫사랑과도 같은 작가이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를 봤는데, 기념품점에서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버전의 <마술피리> 포스터를 판매하고 있었다. 마법과 같은 푸른 색채로 이 세계를 풀어낸 그림을 보자마자 푹 빠져버렸다. 샤갈이 그린 포스터였다. 그때부터 쭉 꿈같은 세계를 표현하는 샤갈의 색채를 좋아했다. 웅장한 공연장, 가족과 보낸 행복한 시간, 황홀한 음악과 연기는 어린 나의 꿈과 동경을 집약한 결정체였다. 샤갈 박물관을 찬찬히 둘러보며 그때 생각에 젖었다. 밝은 채광이 들어오는 미술관 복도에 앉아 아무 생각 없이 피리를 불며 승천하는 듯한 푸른빛의 샤갈 그림을 떠올렸다.




TGV를 타고 파리를 향해 떠나는 날 어쩌면 니스의 바다, 샤갈 그리고 새콤한 오렌지 주스를 다시는 못 만날지도 모른다는 아쉬운 마음 한 구석에 후련한 감정이 숨어 있었다. 목표에 도달했다가 멀어지니 다시 목표가 되는 걸까? 나는 모순덩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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