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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래 Dec 11. 2023

발레리나가 되고 싶어요

안녕하세요, 한 달짜리 파리지엔느예요 3


"더, 더 높이 들어요."

다리에 무게추라도 달아놨나. 어째 다리가 점점 무거워진다. 분명 어깨 근처에 있었는데 아주 빠른 속도로 추락 중이었다. 온몸이 부들거리고, 숨이 턱끝까지 찬다. 더 이상 뛸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들썩인다.


"좋아요, 한 번 더."

그렇지만 선생님은 무자비하다. 분명 우리의 번들거리는 어깨를 보고 있을 텐데, 저렇게 힘찬 목소리로 한 번 더 뛰라고 말하다니. 마치 '이쯤은 가벼운 조깅에 불과하잖아'라는 톤이다. 그래도 열심히 한 번 더 뛴다. 내게 이런 힘이 아직 남아있었나 놀라울 지경이다.


일주일에 많을 땐 주말 빼고, 적어도 3번은 마레 지구에 있는 댄스 스튜디오에서 발레 수업을 듣는다. 발레가 좋아 불문과로 전과까지 했는데 발레 종주국 (이 부분에 대해선 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의 의견이 첨예하다)에서 수업을 듣지 않는다는 것은 뿌리를 부정하는 행위나 다름없다. 공연 시즌이 아니라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공연을 볼 수는 없더라도 폭염에 폭우가 찾아오더라도 수업을 들어야 했다. 솔직히 털어놓자면 나는 공연을 보는 것만큼 발레 수업 듣는 것을 좋아한다. 무대에 선 훌륭하고 재능 있는 예술가에 비할 바는 못되더라도 마음가짐은 이미 발레리나다.


니스의 <repetto>


파리에 도착하기 전부터 성인이 취미로 들을 수 있는 발레 학원을 찾아 헤맸고 100년이 넘는 유서 깊은 댄스 스튜디오를 발견했다. 댄스홀만 다섯 개로 발레는 물론 아프리카 댄스, 현대 무용, 요가 등 다양한 움직임 수업이 진행될 정도라 어쩌면 유명한 무용수들이 거쳐갔을지도 모르다는 생각에 두근거렸다.


오래된 건물은 오를 때마다 삐걱거리는 음을 뱉어냈고 나는 행복한 상상에 젖어 삐걱이는 소리를 박자 삼아 아주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초중급 발레는 '베토벤' 홀이라고 명패가 달려 있는 아주 넓은 홀에서 진행되었는데 들어서자 차가운 나무바닥을 타고 묘한 기운이 올라왔다. 일부러 일찍 도착하길 잘했다. 아무도 없는 넓은 홀을 괜히 한 바퀴 천천히 돌면서 구석구석 훑다가 계단을 타고 오는 인기척에 재빨리 슈즈를 신는 척 나무마루에 앉았다. 발레를 향한 열정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겠지만 파리에서 정기적으로 수업을 듣기 위해 발레 스튜디오를 찾아가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때론 바라던 일과 열망은 상상으로 남겨두는 편이 아름다울 수도 있다. 처음 발레를 시작하고 전과를 강행하던 20대 초반, 상상 속에서 나는 파리의 어느 유서 깊은 스튜디오를 찾아냈다. 커다란 창을 타고 따스한 햇살이 넘실댔고 부드러운 시폰 커튼이 살랑거리는 아름다운 홀이 펼쳐졌고 머리를 틀어 올린 나는 발레복을 캐주얼하게 매치해 스튜디오로 출근 도장을 찍는다. 낯선 이들 사이로 아주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가 수업을 듣고 아름답게 춤을 춘다. 


언젠가 이뤄지길 바라는 나의 미래를 상상하며 행복한 미소를 짓곤 했다. 오히려 완벽한 미래가 망가질까 두려워 현실이 되질 않길 바랐는 지도 모르겠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벌어졌다. 여름 방학에 돌입한 파리 전역에서 겨우 찾아 놓은 발레 학원으로 향하는 길은 멀게만 느껴진 것이다. 망설이고 있었다.


'내일 올까?'
'아, 다 너무 잘하면 어쩌지?'
'파리는 수업료가 더 비싸진 않을까?'


두근거리는 이유가 설레서인지 두려워서인지 나조차 판단이 서질 않았다.


현실 속 댄스 스튜디오는 생각보다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수업 쿠폰은 한국보다 저렴했고 수강생은 다양했다. 일본인 아주머니, 프랑스 할머니, 원정 온 아주 어린 소녀까지. 게다가 선생님은 이탈리아 출신의 남자 무용수로 표현이 아주 풍부한 분이셨다. 춤 앞에 인종이나 나이는 필요 없다는 말을 실감한 순간이. 상상에 그린 아주 커다란 통창의 1층 홀은 아니었지만, 그보다 훨씬 오래된 나무마루와 직사각형 창문이 미래를 현실로 잡아당기고 있었다. 거울에 비친 나는 상상보단 덜 아름다웠지만 훨씬 빛이 났다. 행복했다. 발레복이 땀에 푹 젖을 정도로 격렬한 90분이 흘렀고 아쉬운 마음에 스트레칭을 더 하다가 옷을 갈아입었다.



수업이 끝나면 유독 목마르다. 꿈꾸던 미래가 현실이 되어 그런 걸까. 채워 넣어야 한다. 댄스 스튜디오가 있는 마레지구는 우리나라 성수동처럼 아주 핫한 거리로, 갤러리, 패션, 카페 등이 즐비해 관광객은 물론 현지인도 자주 찾는 거리다.


8월의 파리는 서울만큼 습하고 덥진 않아도 그래도 여름이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모금이 절실했다. 유럽에서 얼음 빠진 커피를 찾는 일은 아주 조심스럽다. 바리스타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혹시, 아메리카노에 얼음 넣어 줄 수 있을까?'라고 아주 사려 깊은 표정을 지어가며 속삭여야 한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을 마주 보고 앉을 수 있는 작은 카페에 들어가서 한참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아이스를 찾아 헤맸다. 당연히 메뉴판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없었다. 고민하다가 갓 나온 브라우니를 보고 홀린 듯이 '뜨거운 아메리카노'와 브라우니주문하고 말았다. 날은 더웠지만 고소한 아메리카노와 달콤한 브라우니는 잘 어울렸고 쫀득하고 풍미 짙은 브라우니를 오물거리며 어쩌면 내 삶이 완벽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삶을 지탱하는 삼각형이 있다면 각 꼭짓점의 위치가 균형을 이루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발레는 3개의 꼭짓점 중  하나로 가식의 갑옷을 벗겨내고 무아지경으로 이끄는 아주 대단한 지점이다. 거기서 나는 숨길 필요도 숨을 필요도 없다. 삼각형이 균형을 이룬다면 줄곧 상상하던 미래가 현실이 되어 나타나도 당혹스럽지 않을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고 따뜻한 커피를 내린 다음 발코니에 앉아 아직 아침잠에 빠져있는 푸르스름한 에펠탑을 감상한다. 언덕 아래로 출근길에 나서는 파리지앵들이 보인다.

'이제 슬 준비해 볼까?'

철다리 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마레 지구에 있는 발레 학원으로 향한다. 쿵쿵쿵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행복한 미래, 아니 현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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