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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래 Dec 25. 2023

미술관 옆 정원

안녕하세요, 한 달짜리 파리지엔느예요 5


처음 파리를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샤를 드 골 공항에 내려 기차를 타고 시내에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어찌나 빠르게 뛰는지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안녕, 파리.’     


아직은 간간이 찬바람이 불던 5월의 파리는 내게 ‘드디어 왔구나. 기다렸어’라고 싱그러운 인사를 보냈다. 그때도 나는 하얀 스니커즈를 신고 정처 없이 걸었다. 어디에 뭐가 있으며, 어떤 게 유명한지 아예 백지상태였지만 랜드마크인 에펠탑을 등대 삼아 센느강을 따라 걸었고 운이 좋아 루브르를, 오르세를, 그랑팔레를 마주했다. 덕분에 지금은 눈을 감아도 센느강을 따라 펼쳐지는 파리의 아름다움과 위용이 선명하게 보인다. 


“파리에서 시간 아깝게 뭐 하냐.”     


남들은 왜 시간 낭비하면서 걷기만 하냐고 비아냥거릴 수도 있지만 나로서는 내 몸과 마음을 다해 첫 파리를 즐기는 방법이었다. 그렇지만 내내 강변을 걷던 나도 센느강의 터널은 기피하게 되더라. 입구에서부터 지린내가 진동하는 데다가 조명도 없어 자꾸만 홱 - 뒤를 돌아보며 움츠러든 어깨를 내려야 했다. 애써 용감한 척 터널을 통과했지만 혹여 냄새라도 들러붙을까 두려워 부리나케 빠져나왔고 두 번 다시 터널을 지나고 싶지 않아 위로 빠져나가는 계단을 찾아내 잰걸음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틜르리 정원과 맞닥뜨렸다.



아름다움의 범주에서 벗어난 파리의 현실을 마주한 일본인들의 파리 증후군을 이해하는 편으로 기울 무렵이었다. 


'이게 진짜 파리지!'


냄새나는 터널 이후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줄곧 상상해 온 광경이었다. 의자마저 초록색인 싱그러운 소녀 같은 정원이 보였다. 그제야 나는 오랑주리 미술관에 걸려 있는 모네의 그림을 퍼뜩 생각해 냈다.

      

인상주의 화가 중에서도 초기 인상파인 모네의 그림을 유독 좋아한다. 어쩜 모네와 인상파 화가들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을 보이는 대로 그릴 수 있었을까? 경이롭다. 우리 눈에 들어온 토마토가 늘 빨간색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는 멍 – 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맞아, 빛을 받으면 은색으로 반짝거리고 어두울 땐 거뭇거뭇하기도 하지. 모네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내게도 그림의 빛이 닿아 나 또한 시시각각 변하는 빛나는 사람이 된 것처럼 기분이 나긋나긋해진다. (종종 화가 치밀어 오르거나, 스트레스가 극에 달할 때 나는 모네의 그림을 본다.)




어느 도시를 여행하든 미술관을 꼭 찾는 편인데 미술관 건물 그 자체로도 방문한 이유가 충족될 때가 있고 운 좋을 때는 예상하지 못한 좋은 전시를 혹은 아주 유명한 작가의 전시를 볼 때도 있다. 나라마다, 도시마다 다른 전시와 관람 문화도 흥미롭다. 물론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좋아하진 않았다. 학창 시절 미술은 내게 최악의 과목이었다. 미술 실기 시간이 되면 어깨가 움츠러들고 입을 앙 다물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수채화 시간이면 내 도화지에는 색보다 종이 때가 더 많았으니 말 다했다. 수많은 직업을 꿈꿨어도 감히 화가를 꿈꿔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중학교 1학년, 인상파와 모네의 <인상, 해돋이>를 배운 날이었다. 햇빛을 받아 시시각각 변화하는 바다의 색깔을 그려냈다는 사실에 나는 완전히 빠져버렸다. 인상주의가 좋았고 그중 모네가 좋았다.


내게 무한한 시간이 주어졌다면 모네의 그림 앞에 언제라고 앉아 있을 수 있었을 텐데... 기다린 10년이란 세월에 비해 이 짧디 짧은 관람 시간은 아쉽기 그지없었다. 


'그렇지만 파리가 밖에서 날 기다리고 있어!' 


감동에 젖어 틜르리 정원에 앉아 여운을 음미했다. 이때의 느낌은 뭐랄까, 어떤 미사여구를 덧붙여도 완벽하게 표현할 수 없겠지만 천천히 밀려와 모래사장을 적시는 봄날의 파도가 된 기분이었다. 내 마음은 투명한 바닷물에 서서히 물드는 모래사장이 되어 여름 햇살치고 상냥한 빛에 물들고 있었다. 모네의 그림을 눈앞에 두고 감상하는 것보다 더 큰 전율이 일었다. 


'파리에선 미술 작품을 보고 난 뒤의 감동과 여운을 이런 식으로 흡수하는 건가?'

'이렇게 좋은 걸 자기네들끼리는 진즉 하고 있던 거란 말이지!'


내 키의 3배 이상이 넘는 커다란 나무를 양 옆에 두고 찬찬히 산책하며 모네를, 파리의 예술가들, 관람객들을 떠올렸다. 철학가 내지는 사색가가 된 듯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미술관 옆 정원에 홀딱 빠지고 말았다.      



이후 줄곧 크고 작은 미술관과 갤러리 그리고 정원을 찾아다녔다. 모네가 있는 오랑주리 미술관만큼 좋아하는 곳이 있다. 바로 미술관보다 더 유명한 정원을 옆에 두고 있는 로뎅뮤지엄이다. 


고뇌에 빠진 남자가 세모난 나무에 둘러싸여 있다. 미술관 건물에 들어가기 전부터 가장 유명한 조각상이 우리 안의 고뇌를 끌어낸다. 내 생각엔 로뎅뮤지엄에선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미술관 내부를 둘러볼 것인지, 정원을 둘러볼 것인지. 호기롭게 둘 다 도전했다가 미술관을 관람하고 나와 벤치에 앉아 뻗어버렸다. 


'나만 그런 게 아니네.'


낮잠을 청하거나, 독서를 하거나, 햇살 피크닉을 즐기는 사람들이 보였다. 나도 나무를 하나 골라 그루터기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쩜 여름 날씨가 이리도 좋을까? 생각하는 사람 흉내나 내볼까?


가장 생명력 넘치는 초록 정원 옆에는 이미 멈춰버린 붓질과 말라버린 물감, 죽은 이와 지나간 풍경을 담은 작품이 걸려 있다. 세월이 흐를수록 가치가 높아지는 그림 옆에 계절에 따라 피었다가 죽었다가 다시 피는 자연이 함께 있다. 인간은 그 사이에서 감동을 느끼고 영감을 받는다. 명화 앞에서 고사리 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소풍 나온 어린 학생들을 보며 생각했다.

미술관 옆엔 정원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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