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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래 Jan 08. 2024

La dolce far niente 1

달콤한 플러팅


요즘은 조금만 서 있어도 종아리가 저릿하다. 오래 걸은 날에는 발바닥 아치가 아려와 바로 잠을 청하기도 힘든 탓에 침대에 누운 상태로 벽에 다리를 기댄채로 일명 'L'자 다리를 만들어 강제적 혈액 순환에 돌입하곤 한다. 그래도 한때는 울퉁불퉁한 돌바닥을 반나절이 넘도록 걸어 다녀도 다음날 멀쩡하게 같은 거리를 더 오래 걸어 다녔던 나인데 시간이 참 무섭다.


어릴 땐 뭐가 그렇게 아까웠는지 버스비, 지하철 요금 몇 유로 아끼겠다고 역과 역 사이를 그냥 걸어 다녔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는 이탈리아의 수도는 온통 돌멩이 길이다. BC 238년 경 착공에 들어간 코블스톤은 도로 정비의 필요성에 의해 시작된 사업이지만 후손들은 덕분에 먹고 산다. 관광객은 손바닥만 한 돌멩이가 알알이 박혀 있는 도로를 걷는 것마저 신기하고 즐거울 따름이다. 로마에선 차도, 자전거도, 사람도 울퉁불퉁 돌바닥을 퉁퉁 소리를 내며 걷는다. 컨버스 한 켤레로 온종일 걷다 보면 얇은 밑창 너머로 유구한 역사가 느껴지는데 어느덧 신발과 하나 되는 기분을 느끼게 될 것이다. 



나는 사실 정처 없이 걷는 중이었다. 파리 골목길에 온갖 멋진 곳이 숨어 있듯 로마에도 관광객은 모르는 진또베기 명소가 숨어 있을 것만 같았다. 코블스톤이 이끄는 대로 골목길에 숨어들었다. 바로 교회가 나왔다. 누구든 환영하는 것일까,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절로 경건해지는 몸과 마음가짐에 작은 골목길 교회를 구경하다가 잠시 엉덩이를 붙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도 없이 그렇게 앉아 있었다. 목적지 없이 걷는 이번 여정이 예상외로 즐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렴 어디에 갈 건지 도착 장소 정도는 정해놓는 성격인데 이번에 내게는 아무 계획도 없었다. 그렇게 또 걸었다.


바닥을 구경하고, 건물을 구경하고, 어쩌다 나오는 거리의 식당을, 앉아서 식사하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던지며 나아갔다. 문득 아침 먹고 아무것도 - 심지어 커피도 - 먹지 않았다는 사실이 관자놀이를 탁 - 쳤다. 불현듯 모든 게 시시해졌다. 처음엔 신기했던 바닥의 돌멩이도 이젠 아스팔트 길과 다를 바가 없었고 오히려 통증을 호소하는 발바닥 때문에 신경질이 났다. 오로지 달달하고 쫀득한 젤라또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었다.



'여기 젤라또의 나라 아니었어?'


어디에도 젤라또 간판은 보이지 않았다. 열 발자국 걸어가면 카페가 나타나는 우리나라처럼 분명 골목이고 대로변이고 젤라또 가게가 그득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는데 실망스러웠다. 베스파를 타고 로마를 누비던 오드리 헵번과 그녀 손에 들린 것과 똑같은 젤라또를 먹으며 "I Love Rome"을 외치고 싶었지만 전부 영화 속 장면일 뿐이었던 걸까. 실망하기 일렀는지 그때 저 멀리 커다란 젤라또 모형을 발견했다. 


도로를 건너 당도한 젤라또 가게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래도 관광객에게 인기 있는 곳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도 점원 입에서 유창한 '안녕하세요'가 나오지 않았다. 에이, 평점이 뭐가 중요할까 이렇게 덥고 당 떨어지는 날, 겨우 발견한 오아시스 같은 곳인데 일단 먹어보자.


손님은 나뿐이었다. 치아를 보이며 활짝 웃는 점원의 미소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젤라또를 먹고 가야 할 것 같았다. 게다가 내 두발은 파업 선언 직전이었다. 로마의 10월이 이렇게나 더울 줄이야. 상큼한 딸기 맛이 좋을까? 아니면 혀가 얼얼할 정도로 달큰한 초콜릿은? 아, 커피도 안 마셨으니 커피맛으로 골라야 하나?


"안녕, 우린 XX맛이 있고 OO도 인기 있어."

이탈리아 훈남의 젤라또 공격이 정신을 못 차려 초콜릿에 딸기를 얹어버렸다.


"컵이랑 콘 중에서 골라주면 돼."

평소 같으면 손가락에 흘러내리는 찐덕거리는 느낌이 싫어서 컵을 선택했겠지만 오늘만큼은 바삭바삭한 와플 콘까지 남김없이 먹고 싶었다.


유리 진열장에 매달려 아이처럼 젤라또 푸는 모습을 구경하는데 훅 - 공격이 들어왔다.


"마카롱도 넣을까?"



'아, 여긴 마카롱도 올려주는 거였구나.'

그대로 좋다고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유럽에선 그 무엇도 무료가 아니다. 스타벅스에서 내 돈 내고 커피를 마신다 하더라도 화장실에 갈 땐 동전을 챙겨가야 하는 매정한 대륙인데 마카롱이 공짜일 리가 없다.


"얼만데?"
"아 너한테만 주는 건데 2유로야."
"아니, 난 괜찮아."


서둘러 젤라또를 받아 나왔다.

"Ciao(그럼 안녕)!"


달고 쫀득한 젤라또, 훈훈한 미남 청년, 화창한 로마의 하늘, 모든 게 아름다워 보였다. 쨍한 로마의 태양 아래, 젤라또를 쥐고 두려울 게 없다. 돌멩이를 밟고 다시 걸었다. 


아주 커다란 젤라또 모형을 발견한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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