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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래 Jan 15. 2024

La dolce far niente 2

로마



로마에는 바티칸 시국이 있다. 나는 그 사실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릴 때 독실한 할아버지를 따라 꽤 열심히 성당을 다녔다. 갓난아기 때 세례를 받고, 초등학교 때 첫 영성체도 받았다. 물론 지금은 일요일 아침 정오까지 침대에서 늘어지는 게으른 시간이 커다란 기쁨 중 하나인 여느 직장인과 다름없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종교적 신념보다 성당의 신성한 분위기와 신에게 영감을 받은 예술가들의 대작, 가톨릭의 유구한 역사와 현재까지 이어지는 바티칸 시국을 비롯하여 종교를 서구 문화와 예술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덕분에 나는 버킷리스트에 죽기 전 교황을 선출하는 역사적인 콘클라베 현장에서 흰 연기를 직접 보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적어 놓았다. 평균 나이 80세가 훌쩍 넘는 추기경들 중 교황이 선출되니 내가 살아생전 적어도 2번 정도는 기회가 있는 셈이다. (악의는 없습니다. 모두 무병장수 하시길)


바티칸 시국이 로마에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잊어버리다니! 달콤함에 빠져 앞으로 앞으로 향했을 뿐인데 넓은 광장이 나왔고 익숙한 오벨리스크가 눈에 띄었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성 베드로 광장이었다. 댄 브라운 소설의 원작 영화 3편(다빈치 코드, 천사와 악마, 인페르노)을 보고 또 보면서 매번 감탄했던 성 베드로 광장은 실제로도 아주 넓고 아름다웠다. 성 베드로 광장을 빙 둘러싼 회랑, 기다랗게 줄 선 관광객을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아, 여기야말로 예약을 하고 왔어야 하네.'


소설가 댄 브라운의 열렬한 팬으로 소설의 주요 배경인 바티칸 시국과 로마 전역을 하도 머릿속에 그려 마치 나도 모르는 새에 가본 적이 있는 건 아닌지 착각할 정도였다. 주인공 로버트 랭던 교수에게 매료되어 소설을 여러 차례 읽고, 영화도 2번 이상 재탕했는데 모조리 잊어버리다니! (한때 나의 이상형은 랭던 교수였다) 아쉽고도 부끄러운 마음에 광장을 서성이다가 근처 기념품 숍에서 파는 성 베드로 광장 모양 자석으로 마음을 달랬다.

'아무래도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가야겠지.'


젤라또도 어쩌지 못할 정도로 기분이 가라앉았지만, 너무 의기소침해 있을 필요는 없다. 테레베 강을 따라 걸으면 필연적으로 산탄젤로를 맞닥뜨리니. 그러나 성문에 당도했을 때 이미 두발은 너덜너덜했고 얼마나 더 걸어야 미카엘 대천사가 심판의 칼을 들고 있는 저 꼭대기에 오를 수 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그냥 입구까지만 보고 돌아갈까?'


찰나의 고통으로 마음이 흔들렸다. 테레베 강을 가로지르는 하드리아누스 다리를 배경으로 버스킹을 하는 사람들과 신나서 뛰어다니는 아이들 그리고 세상에 걱정 따윈 없는 것처럼 풀어진 표정의 어른들이 천사라도 만난듯 행복해 보였다. 행복의 부피가 점점 부풀어 올라 내게도 닿았다.


'바티칸도 못 들어갔는데 산탄젤로까지 포기할 순 없지.'


남의 행복에 쉽게 동승하는 편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산탄젤로 또한 미리 예약을 하고 시간을 맞춰 가야 할 정도로 관광객이 많은 곳이라고 한다. 온종일 걸어 다닌 나를 성 베드로가 가엾이 여겼는지 기다리지 않고 입장할 수 있었다. 뱅글뱅글 통로를 돌아 성을 오르기 시작했다.


방금 전 눈으로 구경만 하다 발걸음을 돌린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산탄젤로를 잇는 비밀통로를 발견해 바티칸으로 숨어든다면? 댄 브라운의 소설에 나온 길을 따라가 볼까?


재밌는 상상에 빠져 두발의 고통마저 사그라들었고 꼭대기에 올라 마침내 들어간 <살라 파올리나>의 압도적인 화려함에 넋을 놓았다. 벽 문양, 구멍, 하나 허투루 지나갈 수 없어 대천사 미카엘 앞에 당도했을 땐 성 입구에서 1시간이 흘러 있었고 작은 창문 너머에 지기 전 더욱 강렬하게 타오르는 오후 4시의 태양 꼬리가 보였다. 4시의 태양은 안절부절 못하던 심장도 차분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낮게 가라앉은 공기와 느리게 흐르는 시간을 가둔 공간에서 태양을 받아 반짝거리는 먼지조차 아름답게 보이는 시간이다.

'산탄젤로성은 저 태양을 2000번도 넘게 마주했겠지.'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는 이탈리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책이다. 내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즐거움'을 소개한 장본인으로 주인공 리즈에게 자꾸 나를 투영하게 만든다.


신선한 파르마산 치즈를 갈아 넣은 토마토 스파게티는 심플하지만 완벽하다. 면 가닥이 입에 들어가자마자 입가에 커다란 미소가 얹히고 귓가에 파바로티의 단단하고 아름다운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엄격한 삶의 규칙이나 일련의 빡빡한 계획도 없이 맛있는 이탈리아 음식을 먹고 매력적인 이탈리아 청년들과 어울리면서 이탈리아어를 배우고 에스프레소 바에서 커피를 단박에 들이켜고 티라미수를 먹는, 있는 그대로를 즐기는 리즈의 달콤한 인생(la dolce vita)을 상상하게 된다.


지난 5년 동안 나는 매일 아침 옆자리에 누워있는 계획과 함께 시작했다. 잠시라도 멈춰 서면 도태되는 것 같아 끊임없이 계획을 세우지만, 완벽하게 마무리하지 못하고 찜찜한 기분을 남겨둔 채 잠자리에 들기를 반복한다. 죄책감과 패배감으로 괴로워하며 다음날엔 더 확고하고 꼼꼼한 계획을 세워 100% 실천하겠다고 다짐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놓아버림'이 절실했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하지.'
'해야 할 일은 가득한데 나는 준비가 안 된 것 같아.'


'바지 한 사이즈 큰 걸로 사면되지.'

살이 찔까봐 걱정되는 마음에 피자를 앞에 두고도 먹길 주저하는 친구에게 이탈리아식 지혜를 선사하는 리즈의 얼굴이 보인다.


나도 유독 아름답고도 달콤한 인생을 주창하는 이탈리아인이 되고 싶다.



테레베 강을 따라 걸으면 시 법원이 나온다. 법원 건물조차 웅장하고 아름답다. 이젠 성역을 벗어나야 한다. 그대로 하드리아누스의 다리를 건너 나보나 광장으로 향했다. 저녁 무렵에 더 활기 넘치는 나보나 광장의 야외 식당을 지나 판테온에 도착했을 무렵 해는 흔적만 남기고 자취를 감췄다. 예전엔 낯선 거리를 어둠이 내린 후 혼자 다니는 내가 타깃이 되지 않을까 무서웠지만 요즘엔 더 자유롭다는 생각을 한다. 오히려 음악과 음식 그리고 와인으로 더욱 붉어진 로마의 얼굴을 잘 관찰할 수 있다.



바글거리는 인파에 합류해서 판테온으로 입장해 어물쩍 단체 관광객 틈에 섞여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판테온을 빠르고 짧게 이해했다. '당신은 우리 고객이 아니잖아요'라고 호통을 칠까 조마조마한 마음에 살짝 떨어져 귀를 쭉 ㅡ 내밀었다. 비가 내려도 물이 들이치지 않는다고 방금 전 가이드가 설명한 판테온의 천정의 구멍을 바라봤다.

'정말 비가 내려도 이곳엔 물이 새지 않는 걸까?'

로마는 역시나 미스터리투성이다.




로또는 안 사더라도 행운은 갖고 싶다. 행운을 빌기 위해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지고 스페인 광장 근처 유명 티라미수 맛집에서 한국어로 환대를 받으며 티라미수를 2박스나 사서 호텔 셔틀버스에 올라탔다. 두발의 안도하는 한숨이 귀까지 닿았다.


호텔방에 도착하자마자 옷을 다 벗어던지고 샤워가운 하나만 걸친 채 씻지도 않고 새하얀 시트에 뛰어들었다. 밤의 피크닉을 열었다. 티라미수 뚜껑을 열고 그대로 한 숟가락 크고 정성스럽게 쏙 -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서 기분 좋은 부드러운 감각만 남긴다. 이전에 왔을 땐 1개만 사서 얼마나 후회했던지 딸기 맛까지 사 오길 잘했다. 배고픔은 가셨으니 천천히 음미하기 위해 책을 펼쳤다. 무려 일주일 만이다. 여유롭고 꼼꼼하게 책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길고 뜨끈한 샤워를 즐겼다. 전신 거울 속에 배가 불룩 튀어나온 여자가 서 있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내일은 치마 입지 뭐.'


로마에서 익숙한 일상으로 돌아온 뒤에도 나는 여전히 빡빡한 하루 계획을 세우고 실패하고 후회하며 잠자리에 드는 어쩔 수 없는 현대인이다. 요즘엔 일주일에 하루 '라 돌체 파니엔테'의 날을 만들어 지난 로마를 떠올리며 '게으른 달콤함'을 즐기려 노력한다. 아, 노력한다는 말조차 '아무것도 하지 않는 즐거움'에 어울리지 않는다. 하루 정도 나는 게으르게 온전히 나를 위한 달콤한 시간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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