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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래 Jan 22. 2024

여행 메이트 1

어느 해의 일본 여행



자매란 참 이로운 존재다. 물론 장점뿐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장점이 단점보다 많다. 성인이 된 후 나의 세상엔 늘 그녀가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로 살기 전까지 우리는 많은 것을 함께했다. 특히 일본 여행의 추억이 상당하다. 지금은 모든 게 흐릿해 어느 지역이었고, 어떤 식당이었으며, 어디서 무슨 경험을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뜬금없이 그때, 계절, 날씨, 옷차림이 조각조각 날아든다. 동생과 함께한 모든 기억은 대게 음식과 함께 온다.


때 이른 더위에 밤만 되면 야맥(야외 맥주) 한 잔이 절실해진다. 가로수의 무성한 녹음, 대기를 가득 메운 습기, 간간이 부는 선선한 바람마저 맥주를 부르는 주문 같다. 참지 못하고 치킨을 배달시켰다. 사실 치킨은 맥주를 마시기 위한 들러리일 뿐이다. 퇴근하자마자 냉장고 깊숙이 봉인해 놓은 캔맥주를 꺼내 식탁에 올려놓고 개운하게 샤워를 하고 나왔더니 수영장을 걸어 다니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습도에 맥주에는 벌써 물방울이 맺혀버렸다. 바로 캔뚜껑을 땄다.

"치익 - "

그대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어라, 330ml가 이렇게 적었던가?' 물론 치킨은 아직이다.


어느 해의 여름 동생과 나는 홋카이도로 여행을 떠났다. 당시 여행이 전부인 것처럼 하루를 보내던 나는 즐겨 읽던 여행 잡지에서 삿포로의 여름 맥주 축제 기사를 읽게 되었고 아주 짤막한 기사에서 다음 여행지를 발견해 버렸다. 당연하게 동생과 여름 여행 계획을 세웠다.

"홋카이도에 뭐가 많네."

"난 맥주축제만 가면 되니까 네가 가고 싶은 대로 정해봐."

술을 잘하지도 못했으면서 맥주축제가 그렇게 가보고 싶었다.


오후 늦게 도착한 공항에서 숙소까지 지하철을 타고 이동했다. 꽤 멀었던 것 같다.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우린 무작정 택시를 잡아타서 맥주축제 거리를 아느냐고 물었다.


"맥주축제 아세요? 길게 쭉 늘어서 있다는데, 그 거리까지 가주세요."

"그럼요."


이것만은 뚜렷하게 기억한다. 딱 1분 걸렸다. 맥주축제가 열리는 거리까지. 

우리가 택시를 잡은 지점에서 직선으로 쭉 걸어가면 5분 정도 걸렸을 법한 거리였다. 일본은 택시비가 비싸기로 악명 높은 도시다. 걷다가 쓰러지기 전까지 택시를 타면 안 된다고 선배들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는데...

'너무 비싼 거 아니야?'

100엔 (약 1200원)에도 벌벌 떨며 여행하던 시절, 역 2개 정도는 거뜬하게 걸어 다니며 아끼던 시절이었다.


달이 높이 뜬 시간에도 온갖 불빛과 여러 말소리가 더해진 거리는 휘황찬란했다. 포장마차처럼 꾸민 부스가 길게 늘어섰고 맥주, 치킨, 꼬치, 아이스크림 등 먹거리를 팔고 있었으며 부스 안쪽으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삿포로의 여름밤을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비싸도 너무 비쌌다. 맥주는 그렇다 쳐도 안주는 바가지 수준이었다. 분위기에 취해 한 바퀴, 두 바퀴 부스들을 돌다가 이내 카라아게를 파는 집 앞에 섰다. 말라비틀어져 볼품없는 카라아게 몇 조각이 코팅된 종이 상자에 담겨 있었다.


"그냥 이거 먹을까?"

"그래, 이거 먹고 배고프면 편의점 가자."


나는 맥주를 동생은 카라아게를 들고 의자를 찾아 기웃거렸다. 우리 주변은 온통 단체 미팅 중인 양복 입은 직장인들과 옆 테이블 여자에게 수작 거는 청년 투성이었다. 한창 핫했던 을지로 노가리골목과 비슷한 풍경이었다. 늘어선 흰 플라스틱 테이블 사이에서 빈자리를 발견했고 의자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짠! 우리 즐겁게 여행하자."

하루가 길었다. 겨우 한 모금 들이킨 맥주는 아주 시원하고 고소했다. 별로일 것 같던 카라아게도 꽤 괜찮았다. 몇 번 집어먹으니 금세 사라지긴 했지만. 다시 가도 다시 말라비틀어진 카라아게를 사 먹을 것 같다. 음식은 추억으로 먹어야 제맛이다.


싱겁게 끝나버린 맥주축제는 삿포로 밤거리 산책으로 이어졌다. 말하지 않으면 일본인지도 모를 송전탑을 배경으로 한 장 찍고 우리 집 앞에 있을 법한 공원 의자에 앉아 온갖 포즈를 잡으며 사진을 찍고 있는데 갑자기 동생이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언니 저기 저 사람 눈이 완전히 풀렸어 무서워. 눈이 하얘(흰자만 보인 모양이다)."


덩치가 커다란 일본 청년이 친구들에게 팔다리를 걸친 채 연체동물처럼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달궈진 맥반석 위에 올려진 오징어처럼 움찔거리는 청년을 가리키며 이제 막 성인이 된 동생에게 훈수를 뒀다.

"저렇게 될 때까지 마시는 거 아니다."


이제 그만 돌아가자고 성화를 부리는 동생에게 10분만 더, 한 장만 더, 잠깐만 더 밤에 머무르자고 조르다가 심상찮은 표정을 보고 발걸음을 뗐다. 우리 자매는 닮았지만 다르다.




도쿄 타워에서 보는 2번째 도쿄 타워


어느 해의 겨울, 도쿄여행이었다. 여행 막바지에 이르러 이대로 돌아가기엔 아쉽지만 그렇다고 관광지에 가기 싫었던 차에 빈티지 거리로 유명한 동네를 찾아가게 되었다. 일본 특유의 정갈하고 섬뜩하리만치 고요한 주거 구역에 도착했고 길을 몰랐던 우리는 고장 난 나침반처럼 역 근처를 뱅글뱅글 맴돌았다. 아주 추운 날이었던 것 같다. 손 끝이 빨개지고 콧물까지 훌쩍거렸고 운동화 속 발가락이 시려 발을 동동거리던 때 어디선가 고소한 기름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일본은 동네마다 자그마한 정육점이 있는데 직접 만든 고기 고로케를 그 자리에서 튀겨낸다. 일본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주인공이 하굣길이나 퇴근길에 '앗뜨뜨'하며 사 먹는 장면을 보고 정육점에서 바로 튀긴 고로케라니 맛이 없을 수가 없겠다고 부러워하곤 했다. 정육점 고로케가 눈앞에 있다니.

"우리 딱 1개만 먹어볼까?"

점심을 먹은 탓에 배가 불러던 걸까? 아니면 새로운 것에 대한 의심이었을까? 무뚝뚝한 주인아저씨 (어쩌면 아주머니. 기억이 흐릿하다)의 시선에서 벗어나고자 손에 뜨끈한 고로케를 들고 골목길로 들어서며 한 입 베어문 순간 절로 탄성이 나왔다. 바삭한 고로케 안에 다진 고기가 가득, 기름보다 육즙이 흘러내리는 황송한 고로케였다.


덕분에 추운 날 오래도록 거리를 걸으며 구경했다. 특이한 만년필을 파는 가게부터 오래된 샤넬, 루이뷔통 등 명품이 즐비한 빈티지 가게가 가득했다. 한 상점에 들어가 마음에 드는 가방을 계속 들었다 내려놨다 고민하는 나를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동생에게 '살까 말까?' 물어보다가 비행기 출발 시간에 임박해 그냥 '우리 나가서 고로케나 하나 더 사 먹자'가 되어버렸다. 입맛을 다시며 골목길을 빠져나와 정육점으로 향했지만 이미 문을 닫은 뒤였다. 한 입 베어물 때마다 텅 빈 반죽에서 기름이 삐죽 삐져나오는 프랜차이즈 빵집표 고로케를 먹을 때마다 그때 생각이 난다.


한파 특보로 하루종일 울어대는 핸드폰을 보다가 공기가 더 얼어버리기 전에 집앞 마트에서 캔맥주를 사 왔다. 뜨거운 김이 펄펄 나는 갓 튀긴 고로케 대신 냉동 동그랑땡을 데워서 안주를 만들어 본다. 여름과 겨울을 한 상에 차려 여행 메이트에게 전화나 걸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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