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래 Jan 29. 2024

여행 메이트 2

일본 자전거 여행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오래된 노트북에는 동생과 함께 찍은 여행 사진이 잠들어 있다. 동생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종종 추억에 젖어 화장실 서랍 속 수건처럼 바탕화면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일본여행_000' 폴더들 중 하나를 열어보면 '우리가 저렇게 후줄근했다고?' 웃음이 터져 나오는 촌스럽고 꾀죄죄한 몰골에 자지러지곤 한다. 그중 아오이케 여행 사진은 우울할 때 누르는 웃음버튼이나 다름없다.


"너 기억나? 그때 내 바지 빌려 입고 벨트도 없어서 충전기 줄로 묶고 나갔잖아."
"맞아, 그리고 추워서 호텔 수건도 내복처럼 둘렀지."

(전날 자전거 여행으로 동생 바지가 더러워져서 급히 세탁을 했는데 다음날까지 마르지 않아 두 치수가 큰 내 청바지를 급히 입었는데 헐렁거릴 정도여서 충전기로 허리를 동여매야 했다.)


아오이케를 감상한 시간은 불과 3-4분 남짓이었지만 영겁의 시간을 보내기라도 한 듯 호수의 푸른빛을 아주 선명하게 기억한다.




대학교 2학년 때, 내가 다니던 학교로 여름방학을 맞아 일본 대학생들이 단기 어학연수를 왔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들이 일본에 돌아가서도 자주 연락을 주고받을 정도로 친해져서 언젠가 일본에서 혹은 한국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까지 할 정도였다. 마침 동생과 함께 후쿠오카로 여행을 떠나면서 유독 날 '언니, 언니'하며 잘 따랐던 아미(Ami)에게 연락을 취했고 후쿠오카 시내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조우했다. 아무 계획 없이 비행기 티켓만 끊고 왔던지라 시간이 여유롭였던 우리에게 아미는 괜찮다면 함께 기차를 타고 조금 멀리 가자고 제안했다. 


잘 모르는 나라에서 어딘가 재미있는 곳으로 안내해 준다니 넙죽 받아들였고 기차를 2번이나 갈아타고 1시간을 달려 바닷가 근처 동물원에 도착했다. 바다 쪽으로 돌출된 야외 공연장에서 돌고래 쇼가 열리는 인기만점 야외 동물원이었다. 꽤 넓어 8월 땡볕에 마냥 걸어서 돌아다닐 순 없었기에 자전거를 대여했지만 사소한 문제가 있었다. 우리 자매는 평생 자전거를 소유해 본 적도, 핸들을 만져본 적도 없었다.


"언니, 우리 자전거를 빌려 타요."
"아, 그럴까?" (망설이며 동생을 바라봤다.)
"그래! 빌리자." 

중심도 못 잡는 주제에 아주 흔쾌히 답해버렸다.


자전거가 아주 익숙한 아미에게 단기 속성으로 중심 잡는 법을 배우고 30분 정도 공터에서 연습에 매진하자 그럭저럭 직진으로 밟을 수 있게 되었다. 페달을 밟자 안장에 올라탄 몸이 앞으로 내달리고 살갗에 바람이 스쳤다. 

'이렇게나 기분 좋은 바람이라니!'

그날 오후, 우리 셋은 자전거를 타고 오후 내내 동물원을 누볐다.


그리고 2년 뒤, 나와 동생은 다시 일본에서 자전거 여행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오로지 '아오이케(청호수)'를 보기 위해 삿포로에서 비에이행 열차를 타고 역에 도착하자마자 호텔에 짐을 풀고 자전거 대여소로 갔다. 아오이케는 감히 전기 자전거로도 왕복 여행이 어려울 정도로 멀었기 때문에 다음날로 미뤄야 했고 아쉬운 대로 지금은 사라진 '철학의 나무' 코스를 따라 가볍게 자전거 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짧다지만 3시간이 훌쩍 넘는 여정이었다. 다행히 전동 자전거라 언덕길을 오르는데 그다지 힘들지 않았고 살짝 구름 낀 날씨 덕에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사색에 잠긴 비에이를 즐길 수 있었다. 문제는 동생이 후쿠오카 동물원 자전거 이후로 단 한 차례도 자전거를 몰아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원래 인간의 운동 근육은 생각보다 엄청난 기억력을 발휘해."
"그래도 좀 무서운데... 도로잖아."
"일단 연습해 보자. 여길 걸어 다닐 순 없잖니."


동생은 잘 가다가 코너링에서 무너졌다. 여전히 직진만 가능했던 것이다. 

'그래도 기억은 하고 있구나.' 


내 뒤에 태워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던 와중에 직진주행에서 빛이 보였다. 동생의 직진본능은 여전하다. 몇 해가 흘러 내가 사는 시골 마을에 놀러 와 논두렁에서 자전거를 탈 때도 코너를 돌 때마다 브레이크를 잡고 안장에서 내려 자전거를 끌며 두 발로 걸어 구간을 빠져나온 후 다시 자전거에 올라탔다.



두껍고 커다란 구름이 땅과 가깝게 떠있고 도로 위엔 우리 둘과 자전거 두대뿐이었다. 자전거와 비길 정도로 느리게 지나가는 일본 특유의 소형 자동차만 보일 뿐 관광객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이름 모를 새의 지저귀는 소리, 휘휘 바람 소리, 전기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유일한 소음인 듯 고요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목가적인 풍경에 잔뜩 뭉친 여행의 긴장이 풀어졌다.


"우리 배고픈데 메론빵 먹을까?"

3시간이 넘게 걸린다는 자전거 대여소 직원의 안내에 출발하기에 앞서 슈퍼마켓에 들러 빵과 음료수를 샀으니 망정이니 허기진 상태로 서로 날카롭게 할퀴며 여행을 마무리할 뻔했다.


1시간, 도로에 앉아 메론빵을 까먹었다. 2시간, 서서히 지쳤다. 아름다운 풍경이었지만 명소라곤 온통 나무였다. 철학의 나무, 모자나무(오야코나무), 크리스마스 나무... 흐린 배경을 캔버스 삼아 서있는 나무들을 멀리서 보니 절로 철학자의 마음가짐이 되었다. 


3시간, 바람이 찼다. 막판 30분, 전력질주하다시피 자전거 대여소를 향해 내달렸고 손에 쥔 지도는 이미 너덜너덜 찢어진 상태였다. 점점 다리가 무거워지는 듯하더니 자전거 전력이 다한 모양이었다.


"여행 잘했어요?"
"네, 근데 좀 힘드네요."
"자전거 잘 안 빌려요 하하. 차 많이 빌리죠."


재밌다는 듯 웃는 대여소 직원이 얄미웠지만 어쩌겠는가. 면허 없이 해외 시골 여행을 단행한 우리의 숙명인 것을. 맛집 추천이라도 받으려고 근처 식당을 물어봤지만, 그의 대답은 애매했다. 식당이 없을 거라나 뭐라나.


일본의 시골마을도 여느 시골과 다를 게 없다. 푸르스름한 어둠이 깔리고 상점 불빛마저 꺼져버린 시간, 서둘러 저녁 먹을 식당을 찾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엄마 아빠에게 "희래랑 다니면 다 굶는다니까" 소리를 또! 귀에 딱지 앉게 듣게 될 게 틀림없었다. (누구든 나랑 여행하면 최소한의 음식만 섭취하게 된다) 식당 간판을 달고 있는 곳은 어김없이 영업을 마무리했고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편의점 도시락이라도 먹어야 하나 의기소침해질 무렵 동생이 불빛을 발견해 냈다.     


"언니, 저기!"


땅이 넓은 홋카이도엔 소를 아주 많이 키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규카츠 맛집이 곳곳에 도포해 있으며 우유로 만든 디저트류가 아주 유명하단다. 동생이 발견한 식당은 평범한 돈가스를 파는 식당이었는데 동네 사람으로 추정되는 손님 여럿이 식사 중이었다. 메뉴판을 뚫어져라 보다가 가장 무난한 돈가스와 카레우동을 주문했다. 그때만 해도 카레에 면을 담가먹는다는 개념이 충격적이었지만 되직한 엄마의 오뚜기카레보다 묽은 일본 카레라면 국물처럼 먹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럭저럭 먹을만했던 카레우동과 대조적으로 맞은편에 앉은 동생의 얼굴엔 감동으로 가득했다. 겉모양은 평범한 돈가스였는데 평소 먹던 돈가스와 전혀 다른 맛이었다. 바삭하지만 아주 얇은 튀김옷, 지방이 적절하게 낀 두툼한 고기와 쫄깃한 육질, 소스 대신 카레에 푹 찍어 먹었다.


"우리 하나 더 시켜서 싸갈까?"

이걸 한 끼밖에 못 먹는다는 아쉬움에 욕심을 부렸지만 디저트로 우유 푸딩까지 먹고 나자 뱃속에선 그만하라고 아우성이었다. 온몸에 튀김 냄새를 묻히고 호텔 방에 돌아와 샤워하자마자 쓰러져 잠들었다. 

다음날 새벽, 우린 아오이케를 보러 가야 했다.

이전 11화 여행 메이트 1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