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래 Feb 19. 2024

어쩌면 여행은

직접 가보는 것보다 상상할 때가 더 아름다울 수도 있잖아


비행기를 타면 세상에 모든 걱정이 사라진다. 구름 사이를 헤치고 여행지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에 어쩌면 이 상황이 행복한 거짓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걱정과 불안으로 향하기 전에 대게 우회한다. 이제 막 이륙한 비행기 안에서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친절한 승무원들이 나눠준 메뉴카드를 보며 기내식을 고르고 만면에 미소를 띠며 주위를 둘러본다. 기내에서 나는 가장 관대하고 여유롭다. 

‘여기서 내리고 싶지 않아’


컨베이어 벨트에서 나오지 않을 것만 같은 캐리어를 기다렸다가 낑낑대며 공항을 벗어나 시내로 진입하기 위해 버스나 기차를 타기 위해 진을 빼고 오래된 지하철 계단을 힘겹게 올라 마침내 숙소에 도착하면 온몸의 힘이 다 빠져버리고 만다. 그럴 바엔 행복한 상상을 하며 영원히 구름 위를 돌아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때 기내식이 나온다. 땅을 밟고 서 있을 때는 거들떠도 보지 않을 허름한 일회용 용기에 담긴 나트륨 수치를 훌쩍 넘긴 음식을 열렬히 환영한다. 나는 국수(noodle)를 원했지만 앞줄에서 끝났다는 승무원의 미안한 표정과 거듭되는 사과에 ‘남은 거 아무거나 주세요’ 미소로 답한다. 하늘에서 나는 관대하다.      


곧 착륙이다.

“행복한 여행 하세요.”

감사한 인사에 ‘제가 과연 행복하게만 여행할 수 있을까요?’ 반문하려던 마음이 구석으로 숨어버리고 희망으로 부풀어 오르지만 입국심사대의 기나긴 줄 앞에서 푹 꺼지고 만다.      




2월 초, 절 아래 산골로 이사 갔는데 어제 드디어 이삿짐 정리를 끝마쳤다. 종종 머리 위로 지나가는 비행기를 발견하면 '도착지가 어디일까?' 상상하는 재미도 이젠 포기해야겠다.


마을 입구에 빙벽이 있다.


“나 시골로 이사 갔어.”
“너 원래 시골 살잖아.”
“응 근데 더 시골이야. 여기 편의점도 없어.”

진작에 친구들 중 유일하게 시골 사는 아이가 되었지만, 이번에 이사 간 더 시골 같은 이 풍경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나도 헷갈릴 지경이다. 국도를 달리다가 샛길로 빠져 구불구불 산길 따라 10분을 달리면 오래된 절 아래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있는 작은 마을이다. 언제 사람이 나올지 모르는 좁은 길을 제한 속도보다 느리게 걷다 보면 경운기가 나타나 도착 예정 속도가 늘어나기도 한다. 길 양쪽으로 오래된 시골집이 죽 늘어서 주황, 초록, 파란 지붕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사실 저렴한 월세에 집 사진만 보고 덜컥 입주를 결정했다. 사진으로 본 집은 아담하니 아늑해 보였고 주변도 조용해서 (이사 와서 사람보다 길 고양이를 더 많이 만났다) 집중이 잘되어 금방이라도 멋진 글을 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조깅을 뛰고 집필에 몰두한다는 하루키처럼 나도 시골길을 산책하고 차갑지만 포근한 시골 아침 공기로 폐를 정화한 뒤 연필을 들어 글 쓰는 삶을 꿈꾸며 현관문을 열었건만 정작 나를 맞이한 건 현관 가득 고여있던 불쾌한 곰팡이 냄새였다. 태어나서 처음 맡아보는 냄새였지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다 뜯겨 나간 현관 벽지 사이는 악몽에 등장하는 괴물의 털처럼 까맣게 물들어 있었고 신발장 안 나무 선반 아래는 까만곰팡이가 무더기로 서식 중이었다. 검지손가락으로 코를 틀어막고 따지듯 물었다. 


“여기 사람 살던데 맞아요?”
“그럼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당당한 대답이 돌아왔지만 도저히 신뢰가 가질 않는 얼굴이었다.     


내부는 더 난장판이었다. 층고 높은 집구석구석 빠짐없이 곰팡이 냄새가 퍼져 있었고 전주인이 버리고 간 (심지어 마지막에 대추차라도 마시고 간 건지 말라비틀어진 대추 세 알이 부엌 개수대에 들어있었다) 오 마이갓! 온갖 잡동사니가 집안 곳곳, 복층 계단을 올라갈수록 머리가 지끈거렸는데 이게 곰팡이 냄새 때문인지 예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전 세입자에 대한 분노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침실 옆에 붙은 작은 발코니를 보자 알 수 있었다. ‘아, 이 두통은 분노에서 왔구나.’ 발코니에서 농사라도 지은 걸까 어쩜 이렇게 흙이 흥건할 수 있지?     


기존 입주 날짜를 뒤로 미루고 청소부터 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이 난장판을 이사하고 청소하는데만 5일이 걸렸다. 락스를 무려 4통을 비우고 나서야 6시간 사투가 마무리되었다. 지인 중에 유품정리 및 집 청소를 업으로 하는 사람이 있는데 얼마나 힘든 일을 하고 있는지 그의 고충을 절로 헤아리게 되었다.     


겨우 청소를 끝내고 비 오는 날 첫 번째 이삿짐을, 2차, 3차, 4차... 내게 이리도 짐이 많았던가 자조하며 절 아래 이사 가는 김에 다시 무소유의 삶을 꿈꾸며 마지막으로 부엌 그릇과 접시를 옮겼고 지금은 아직도 곰팡이 냄새가 가시지 않는 새로운 집 거실에 앉아 기분 좋은 여행지 상상을 하며 글을 쓰는 중이다. 틈이 나면 혹여 옷에 냄새가 밸까 영화 기생충 속 기정이네 가족을 서글프게 떠올리며 열심히 빨래를 돌리고 페브리즈를 뿌려댄다. 아무리 봐도 올해 내 삶에 여행은 없을 성싶다.      


‘어쩌면 여행은 직접 가보는 것보다 상상할 때가 더 아름다울 수도 있잖아.’     

환경 호르몬을 유발하는 기내식, 줄줄이 꿰맨 소시지 같은 슈트케이스, 승무원들의 매끄러운 미소, 안전요원의 형광조끼는 그립지만, 어쩌면 여행은 피에르 바야르의 말처럼 방구석에 들어앉아 연구하고 상상할 때 더 충만할 수도 있다. 한적한 시골에서 봄엔 텃밭을 일구고, 여름엔 평상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가을엔 절 구경, 겨울엔 머리 위 반짝거리는 별빛 감상하며 시골 일상 속 여행만큼 설레는 낯선 풍경을 들여와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에 대해 진득하니 풀어보려 한다.


이전 13화 여행 메이트 3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