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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래 Feb 12. 2024

여행 메이트 3

함께하는 여행의 장점


아오이케는 단어 그대로 푸른 호수(靑湖)다. 옥빛에 가까운 푸른 물은 고여있지만 썩지 않는다. 호수 주변을 병풍처럼 둘러싼 푸르른 나무와 대조적으로 호수 속 바싹 마른 낙엽송들이 수호신처럼 죽지 않고 꼿꼿하게 서 있다. 


안타깝게도 뚜벅이 여행자의 유일한 교통수단은 버스뿐인데 설상가상 시골마을에서 아오이케를 경유하는 유일한 버스는 배차 간격이 길었다. 우리는 출근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이른 시간에 호텔 앞을 지나는 버스를 반드시 타야 했다.


"언니, 근데 돌아올 때는?"
"시간표 보고 계산해 보자."


가장 합리적인 시간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14분 뒤에 반대편에서 돌아가는 버스를 타는 것이었다. 아니면 2시간을 기다려야 했는데 8월답지 않게 기분 나쁜 추위가 옷 속을 파고들었고 옷깃을 적시는 가랑비는 멈출 기미가 없어 보였고 아무리 신비로운 풍경이라 할지라도 넋 놓고 서서 푸른 세숫대야만 바라보기엔 너무나 비효율적이었다. 게다가 삿포로로 돌아가는 기차 시간과도 맞지 않았다.


"일단 내리자마자 뛰자!"

정류장에선 또 얼마나 멀던지 물웅덩이를 피하지도 못하고 첨벙 대며 달렸다. 먼저 호수에 도착한 동생은 큰소리로 나를 부르며 재촉할 법도 한데 아무 소식이 없었다.


작은 새의 지저귐

나뭇잎에 닿는 빗방울

호수로 떨어지는 가느다란 빗줄기


푸른 호수는 모든 소리를 흡수했다. 아무도 없는 이른 새벽, 옅은 안개에 휩싸인 영롱한 아오이케는 이제 막 잠에서 깬 듯 희미하지만 영롱한 빛깔을 보여줬다. 신비롭고 아름다운 자연 앞에서 무슨 말이 필요할까. 우린 멍하니 '미생물 같은 많은 걸까? 플랑크톤 같은 거 말이야' 따위의 의미 없는 헛소리를 중얼거렸고 (물속에 콜로이드성 수산화 알루미늄이 있기 때문이란다) 이내 입을 다물고 눈앞에 지금 보이는 풍경에 몰두했다. 감상을 나누는 시간도, 멋있다고 호들갑 떠는 시간도 아까웠다. 여기를 떠나 집으로 돌아가서도 조금이라도 더 오래 기억하고자 뚫어져라 호수를 바라보며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시간이 없었다. 못내 아쉬운 마음을 접고 다시 첨벙첨벙 달려 때마침 반대편으로 오는 버스를 잡았는데 우릴 내려준 바로 그 버스였다. 기사님 표정은 어리둥절해 보였다. 

'얘네 왜 또?' 

왠지 변명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아오이케..(우물쭈물).."
"파하하하하"

불현듯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세수도 안 한 마른 얼굴에 경이와 감탄이 머물렀다가 장난기가 찾아왔다. 우린 가지고 있던 모든 옷을 아무렇게나 걸쳐 입고 호텔 수건을 머플러 삼아 둘렀고 분홍색 불투명 우비를 뒤집어쓴 몰골이었다. 



누군가와 함께하는 여행에서


싸우지 않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아무래도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이 다른 (혹은 같다고 여겼던) 성인 둘 이상이 일상을 벗어나 아름다운 일탈을 상상하며 생소한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일은 예상대로 엄청난 재앙을 불러온다.


'난 아침으로 밥 먹어야 해.'
'난 걷기 싫어.'
'난 쇼핑해야겠어.'


성인이라면 무릇 상대를 배려해야 하지만 우리는 여행지에서 어린아이가 되고 만다. 다 큰 성인이 함께하는 여행은 재앙이다. 지금도 내 생각엔 변함이 없다. 처음 함께 여행할 때는 많이 다퉜다.

"언니는 왜 그렇게 체면을 세우는 거야!"
(국가대표는 아니지만 밖에서 우리가 잘 보여야 한다는 고지식한 자세다.)


"너는 왜 한 번에 내 말을 못 알아듣니!"
(답답해 동생을 보채면 조급해하고 날카로워진다.)

이제 일상 밖에서도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 명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싸우는 일이 없다.


우리는 공통의 추억을 안고 앞으로 10년 뒤에도 아오이케의 영롱한 푸른색이나 촌스럽던 서로의 옷차림을 떠올리며 놀려댈 것이다. 기억의 순기능 덕에 온통 좋은 추억뿐이라 수시로 여행의 서랍을 뒤적거리며 낄낄대고 즐거워한다. 서로 떨어져 있어도 마찬가지이다.


어쩌다 추운 날 유난히 고소한 라떼라도 마시는 날이면 나는 '아, 우리 아라시야마에서 반짝이는 강물을 보며 아라비카 커피 마셨었는데'라고 중얼거리며 동생에게 전화를 걸곤 한다. 같은 풍경을 보고, 같은 음식을 먹고, 추억을 공유하며 상대의 기억 속에 내가 있다는 사실로 나는 지금도 마음이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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