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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래 Dec 18. 2023

모네가 남겨놓은 빛

안녕하세요, 한 달짜리 파리지엔느예요 4


바깥세상의 온갖 소음과 내 것이 아닌 감정으로 녹아내릴 것 같은 날, 집으로 돌아와 거실에 앉아 8월 파리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면서 나는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모네의 수련 연작이 모니터를 뚫고 나올 듯 강한 빛을 뿜어내면 비로소 정화되는 기분에 휩싸여 불현듯 허기짐을 느낀다. 옷을 갈아입고 라면물을 올려놓고 타인의 여행이나 여행 다큐를 틀어놓고 나를 달래면 그제야 그날이 꽤 괜찮아지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틜르리 정원 사진에 멈칫 금세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로 돌아가버렸다. 



크고 작은 갤러리와 미술관이 넘쳐흐르는 파리에서 모든 예술 작품을 둘러보는 일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경복궁 옆에 사는 서울 시민이 밥 먹듯 궁 안에 들어가서 산책하거나 사진을 찍지 않는 것처럼 파리 생활에 익숙해질수록 루브르 박물관이나 오르세 미술관처럼 유명한 장소와는 저절로 멀어졌다. 아침에 일어나 산책하고 커피를 마시고 발레 수업을 듣는 평범함에 완전히 빠져 여행 중인 외국인의 본분을 소홀히 하게 된 것이다. 게을러진 게 맞다. 분명 루브르 코앞까지 산책 삼아 매일 걸어갔다가 유리로 된 피라미드만 보고 돌아오기 일쑤였으며 오르세 미술관은 센느강을 건너지도 않고 맞은편에서 서서 '와, 저기가 기차역이었다고?' 수업시간에 주워들은 정보만 중얼거렸다. 저 긴 줄에 합류하여 모나리자의 웃는 건지 앙 다문건지 희미한 입꼬리를 가까이에서 보겠다고 수십 개의 뒤통수 뒤에 내 머리 하나를 더하고 싶지 않았다. 유리 피라미드 앞에서 망설임 없이 뒤를 돌아 근처 스타벅스로 향해 그 흔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켜놓고 책을 읽다가 귀가하곤 했다.

애초에 '파리 한 달' 투두 피스트에 루브르는 없었다. 나는 미술관 옆 정원에 가고 싶었다.



파리의 미술관은 정원 곁에 있다. 파리지엥이 의자에 앉아 책을 읽거나, 연인의 무릎을 베고 누워 낮잠을 청하거나, 느긋하게 산책을 즐기는 모습은 아주 자연스러워 보였다. 호젓한 미술관 옆 정원에서 사람들은 잠시 숨을 고르고 발바닥과 허리에 휴식 시간을 주는 것이다. 일부러 미술관 옆에 정원을 설계한 것일까? 관람 후에도 그들은 정원을 거닐며 감동 혹은 충격을 흡수하고 작가의 의도를 곱씹는다.


내가 미술관을 관람하는 방법은 참으로 힘겨웠다. 소위 핫한 전시가 시작되면 지하철을 타고 몇 정거장이고 지나 겨우 지상으로 올라가 네모난 건물로 들어가 숨쉴틈 없이 액자에 눈도장을 찍으며 돌아다니며 관람하곤 했다. 욱신거리는 발바닥과 뻐근한 허리를 애써 무시해 가며 어떻게든 마지막 작품까지 보겠다는 일념으로 관람을 마치고 나와서 사람으로 가득 찬 근처 카페에 앉아 집 나간 영혼 찾기 바빴다.

'내가 과연 제대로 관람한 것인가, 기억이 잘 안나.' 


여기선 아무도 바쁘지 않았고 허리가 아파 연신 허리를 숙이거나 콩콩 두드리는 사람도 없었다. 스케치를 하고, 의견을 나누고, 고뇌하던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루브르 제대로 보려면 한 달이 꼬박 걸리죠."

한 미술 평론가의 이야기를 듣고 '아, 루브르는 이번이 아니라 다음에 일 년 살기 할 때 봐야겠다'라고 마음을 먹었다. 도시 자체가 문화 예술이라 도처에 교과서 속 작품이 포진해 있는지라 관광객은 의무적으로 미술관 도장 깨기를 다니곤 하는데 나는 아꼈다가 평생에 걸쳐 천천히 음미하고 싶었다. 털어놓자면 한 군데만 대충 돌아봐도 허리가 아파 수시로 스트레칭을 해야 하는 형편없는 체력 때문에 매일 관람은 무리였다.


그럼에도 파리 한 달 살기의 투두 리스트에 든 유일한 미술관이 있었다. 모네의 수련 연작이 있는 오랑주리 미술관이었다.



빛을 흡수한 뒤 배로 돌려주는 수련 연작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커다란 타원형 전시실을 가득 채운 수련 연작은 어릴 적 읽은 <비밀의 정원>을 연상케 했으며 내게 닿아 더욱 반짝거렸다. 나는 홀린 듯 그림에 가까이 다가갔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녹색, 파란색, 보라색의 줄. 두 걸음, 세 걸음 멀리 떨어져야 수련의 위용이 차차 드러났다. 바로 근처에 루브르와 오르세가 있기 때문일까? 대기줄을 서지 않아도 입장할 수 있고 수련 앞에 마련된 벤치에 앉아 얼마고 원하는 대로 멍하니 모네가 남겨놓은 빛을 감상할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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