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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적 Feb 13. 2023

1인 워크숍 | 재생 공간과 중고 서점, F1963



여전한 그곳


F1963이 처음 문을 열었던 2016년에도 이곳에 왔었다. 부산 비엔날레가 열리고 있었는데, 한창 재생 공간의 빈티지함에 흠뻑 빠져있을 때라 이곳은 내게 너무도 힙하고 감각적인 복합문화공간으로 다가왔다. 8년이 지난 지금 내게 재생 공간이란 과거의 취향에 현재의 가치가 더해져 더 의미 있는 곳이 되었다. 


여전할까 아니면 변했을까. 궁금함은 발걸음을 옮기게 했고 녹슨 철문과 다 벗겨진 시멘트 바닥을 보고 반가움과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키 큰 대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공장 바닥이었던 콘크리트를 잘라 붙여 만든 산책길은 여전했다. 짧지만 강한 임팩트를 남기고 잠깐이나마 마음에 휴식을 주는 곳이라는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렇게 자연과 업사이클링이 함께 공존하는 공간이 도시에 더 많아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늘 그런 생각뿐이다.





인적이 드문 평일이라 천천히 걸으며 이곳을 곱씹을 수 있었다. 이런 숲을 갖고 싶다고 생각했다. 잔디밭과 하늘뿐인 정원 말고 키 큰 나무들이 지켜주는 작은 나만의 숲말이다. 내 집 앞에 마당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작은 공간 안에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생명 다양성을 꽃피우게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산책길의 끝엔 특유의 하늘색 철골 구조의 F1963이 보였다. 건물의 외형이 마치 공장 같다고 느꼈다면 바로 본 것이다. 이곳은 바로 옆에 본사를 두고 있는 '고려제강'의 와이어 공장 부지였다. 공장을 연상시키는 외형과 녹슨 기계, 부품 같은 것들은 이곳의 디자인적 특성이자 감성인 동시에 역사이기도 하다.




건물의 정중앙인 마당에 들어오면 사방이 빛바랜 철골 구조물로 둘러싸여 있고 고개를 들면 하늘이 보인다. 계단 위로 올라가 이곳을 내려다볼 수도, 카페에 앉아 하염없이 바라볼 수도 있다. 어디에도 없을 유일한 풍경이다. 시간의 흔적이 만들어낸 미학은 그 어떤 걸로도 흉내 낼 수 없다. 


매거진 B의 뉴스레터를 읽다가 인상적인 구절을 발견했다. '우리 스스로가 만든 한계는 창조성을 끝까지 끌어올려 준다.’ 코펜하겐의 제로웨이스트 식당을 운영했던 매슈 올랜도의 말이었다. 업사이클링이 예쁘지 않은 건 재료의 한계 때문이라는 시선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는 건 그 한계를 뛰어넘는 많은 도전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너무 많은 건물들이 허물어지고 새로 지어지면서 점점 더 반듯하고 획일화된 도시에 잠식당하는 기분이 든다. 일반인들은 볼 일이 없으니 인식조차 하기 힘든 거대한 건축 폐기물들 역시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건 아닐 텐데, 재개발이 로또인 세상에서 지속 가능한 공간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건축에 관해 전문적 지식이 없는 도시인 중 한 명의 시선으로 봤을 때 재생 공간보다 더 지속 가능한 방식은 없다. 이보다 더 깊은 스토리를 담아내며 유일무이하게 영감을 줄 수 있을까. 개인의 취향으로 잘 깎아낸 반듯하고 단순한 영감 말고 삐죽빼죽 모나고 다채로운 그런 영감 말이다. 깔끔한 동네의 아파트에 단정하게 집을 꾸며놓고 살면서도 사람들이 허름하고 어두컴컴한 골목길을 찾아가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사진을 찍는 이유와 삐죽빼죽한 영감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여행에 웬 중고서점


8년 전과 달라진 점은 바로 중고 서점이 생겼다는 점이다. 지속 가능한 여행을 위한 재생 공간 방문에 중고 서점이라니 이보다 완벽할 수가. 나를 이곳에 다시 오게 한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였다. 게다가 알라딘이 아닌 예스24의 중고서점은 처음이었다.




이곳 역시 세월의 흔적과 새로운 문화가 공존하는 곳이었는데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주인을 기다리는 중고책들과도 묘하게 닮아있었다.





일단, 거대한 규모에 놀랐다. 분야별로 나누어진 이 모든 책들이 중고 서적이라는 걸 믿을 수 없었다. 혹시 중간에 새 책이 섞여있는 건 아닐까 의심했지만 책의 뒷면에 할인된 바코드가 이 책은 명백한 중고임을 나타내주고 있었다. 새 책은 고르고 고르는 편이지만 이곳에서만큼은 가져갈 수 있는 만큼 마음껏 소비하고 싶었다. 


눈은 바쁘게 돌아갔고 어쩜 그리 타이밍 좋게 나의 관심사들이 탁탁 발견이 되는지 놀라울 정도였다. 애써 찾으려고 할 땐 쉽게 찾아지지 않던 책들이 우연인지 필연인지 내 눈앞에 쏟아졌다. 한참을 머물러 책을 고르고 읽었다. 여행길에 중고서점은 너무나도 특별한 순간이 되었고 특별한 책들을 만나게 해준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내가 고른 세 권은 아이를 위한 영어 그림책과 아이를 위한 아토피 식단 책과 나를 위한 소설책 한 권. 나에게 흥미를 주는 것들과 내 삶에 비중을 차지하는 것들이 어떤 것인지 이 세 권이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요즘 우주에 관한 질문을 했던 게 생각나 우주를 영어로 알려주고 싶은 엄마 욕심에 한 권을 골랐고, 이미 아토피는 다 나았지만 피부가 예민한 타입인 아이를 위해 여전히 관심을 두고 있던 아토피와 관련 식단에 관해 쓴 책이 있어 단숨에 골랐다. 


한 권은 오롯이 나를 위한 책을 골랐다. '여름과 루비'라는 제목 그 자체로 마음이 정화되는 것 같은 이 책은 박연준 작가의 소설이다. 취향이 꽤나 비문학적이라 내가 좋아하는 문학이 몇 안 되는데 이 분의 글에 대한 나의 소화력은 유달리 좋다. 아무런 힘을 들이지 않아도 술술 잘 읽히고 그저 받아들이게 되는 글, 단락이 언제 끝나는지 확인하고 싶어지지 않는 그런 글이다. 여기서 만나다니 이건 마치 운명 아니면 필연.




정가 38,800원짜리 책을 22,410원에 사고 봉투 없이 에코백에 꽉 채워 무거워진 내 어깨는 아낀 돈 그 이상으로 흡족스러웠다. 집 가까이에 이렇게 큰 대형 중고서점이 있다면 얼마나 즐거울까. 매일 보물찾기 하러 가는 기분일 텐데.



달빛 가든과 뒤뜰 정원


뒤뜰 마당을 구경하기 위해 중고서점을 나와 화려한 현대 모터 스튜디오의 그래픽 영상을 보며 걸었다. 전시도 보면 좋았을 텐데 이번 여행에선 전시와의 인연은 여기까지.





뒤뜰 정원은 산책하기에 좋은 공간이기도 했지만 책을 읽을 수 있는 모든 공간으로 연결되는 플랫폼처럼 느껴지는 것이 좋았다. 사색하며 책을 읽을 수 있는 유리온실, 회원제로 운영되는 유료 도서관, 중고 서점인 YES 24까지. 마음의 여유와 양식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각각의 방식이 모여있었다.



테라로사에 앉아서


어둑어둑해질 무렵 F1963의 투어를 마치고 테라로사에서 휴식을 취했다. 투박한 감성의 이곳과 참 잘 어울리는 카페다. 테라로사 역시 특유의 빈티지한 인테리어가 특징인 곳이라 이곳과 참 잘 어울린다. 테라로사의 비건 라떼는 아직 출시되지 않았지만 광화문 테라로사에서 주말에 자주 먹었던 브런치는 여전히 내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상큼한 걸 마시고 싶어 민트 레몬에이드를 주문했다. 빨대는 빼고. 달달한 민트 시럽이 컵 바닥에 가득했지만 손목 스냅을 이용해 적당히 섞어 마셨다. 이런 건 이제 내게 불편함이 아닌 익숙한 루틴이다.




조용히 그리고 다채롭게 영감을 주었던 F1963에서의 시간. 다음번엔 가족과 함께 와보려고 한다. 우리 아이에겐 또 어떤 세상의 만남이 될지 기약도 없는 그날이 무척이나 기대가 되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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