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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적 Feb 20. 2023

1인 워크숍 | 부산은 역시 빈티지 탐방이지


8년 전 친구와 함께 구경했던 국제 시장의 빈티지 가게들은 내겐 하나의 관광지였다. 평소에는 가지 않는, 그 지역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그러면서도 내 일상에는 들여놓지 않는, 있어도 쓰지 않고 없어도 상관없는 기념품 가게 같은 것. 그때 나의 시선이 그랬다. 오랫동안 빈티지를 좋아했지만 수집하지 않은 이유도 비슷했다. 특유의 빛바랜 흔적을 바라보는 건 좋았지만 그것들이 굳이 나를 수식하는 건 취향에 맞지 않는다고 여겼다.

가치관은 참 강력한 것인지 내 안에 흩어져있는 취향의 찌끄러기들을 모아 빈티지에 맞게 재정립하기 시작했다. 취향을 버리거나 거스르지 않고도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 보니 나는 또 그렇게 빈티지 가게들을 기웃거리고 있다. 빈티지를 소비한다는 건 그 멋을 안다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새 물건을 소비하지 않으려는 다짐과 주인을 잃어버린 물건들에 새로운 쓰임을 부여한다는 의미가 더해져 내 안에 거대한 하나의 지향점이 되고 있다.

도심에서 빈티지숍을 찾는 건 편의점이나 카페만큼 쉬운 게 아니다. 최근 몇 년 간 옷을 구매할 땐 다양한 중고 거래 플랫폼을 이용해왔다. 당근 마켓에서 직접 원하는 옷을 찾기도 하고 백화점에서 팝업으로 열리는 빈티지 플랫폼 '마켓인유'에서도 옷을 구매했다. 얼마 전엔 온라인 중고 패션 플랫폼인 '콜렉티브'에서 새것 같은 겨울 패딩을 샀다. 서울 일부 지역에 빈티지숍이 콕콕 숨어있긴 하겠지만, 시간도, 여유도, 공간도 허락되지 않는 경기도민 프리랜서 육아맘에겐 진입 장벽이 높다.

이번 여행에서 빈티지숍 방문은 필연적이었다. 지속 가능한 여행에 필수 코스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무엇보다 부산하면 빈티지 아닌가. 지리적 특성 덕분에 개성 있는 수입 빈티지 의류가 많은 곳이니 최소한 몇 군데는 가보자 싶었다.



흰여울마을


비건 식당 찾아 영도 간 김에 손목서가 찾아 흰여울마을 간 김에 빈티지 소품숍인 '리사네 잡화점'에 갔다.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골목에 작고 비밀스럽고 가득찬 공간은 참 매력적이었다.




일본에서 건너온 빈티지 소품들이 가득했다. 빈티지 소품숍 특유의 귀엽고 장식적이며 앤티크한 감성이 느껴졌다. 인상적이었던 건 누군가가 오래도록 목적 없이 수집해온 수집품들이었다. 알 수 없는 그 누군가 들은 그 물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서 그렇게 오랜 시간 한 가지 카테고리의 물건만 모았던 걸까. 경제적 가치를 기대할 수 없는 것들에 집중 혹은 집착할 수 있었던 힘은 무얼까. 만족감 혹은 소중함 혹은 또 다른 어떤 것일까.



차들이 오가는 대로변 쪽에 '인터할'이라는 빈티지숍이 있었다. 그간 익숙하게 지나쳐왔던 빈티지의 전형 같기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잡화점 같기도 했다. 정리가 안된 것 같으면서도 잘 관리되어 있는 어두컴컴한 요새 같은 가게였다. 어찌 보면 창고 같기도 하고 건질 게 없어 보이기도 했다. 여기선 기대할게 없겠다고 판단하고 마음을 내려놓은 채 설렁설렁 구경을 시작했다.

그런데 참 묘한 곳이었다. 나이가 지긋하신 이모 또래의 여성분이 운영하시는 곳이었는데 그와 비슷한 다른 이모들이 정겹게 수다를 나누며 적극적으로 옷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동네 마실인가. 오래된 거실에서 가져왔을 법한 큰 식탁과 의자들은 그곳의 라운지였다. 드문드문 전혀 다른 나이대의 손님들도 오가는 속에서 나는 가게 안에서 유일한 또 다른 연령대를 담당했다. 



대체로 취향을 찾기 어려울 것만 같은 옷들 사이에서 나는 괜찮은 일상복 하나를 발견했다. 겨울에 데일리하게 입기 좋은 골이 굵은 와이드 코듀로이 팬츠를 발견했는데 마침 나에겐 없는 브라운 컬러라는 점도 사이즈가 넉넉하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살까 말까. 입어볼 수는 있나. 사장님께 여쭤보니 탈의실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얇은 커튼 뒤 행거 사이 코너를 안내해 주셨다.



어릴 적 할머니를 생각나게 만드는 자개 경대 앞에서 주섬주섬 옷을 입어봤다. 차갑고 어두웠지만 싫지 않았다. 은근 편하고 핏도 나쁘지 않네. 이젠 이렇게 캐주얼하고 편안한 아이템을 보면 '하원룩으로 놀이터 다닐 때 괜찮겠어.'라는 생각부터 떠오른다. 




그렇게 이 바지는 내 것이 되었다. "요즘 이런 게 유행인가 봐. 손님들이 많이 사가시네." 그렇다. 일본 보세 구제가 대부분인 듯한 이곳에서 난 트렌드 아이템을 골라낸 것이었다. 새 물건을 사지 않고도 충분히 소비한 나의 쇼핑은 꽤나 만족스러웠다.



국제시장


페어 플레이(shop pair play). 국제 시장 건너편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 5층에 위치하고 있었고 레트로한 픽셀 느낌의 폰트가 새겨진 간판까지. 힙한 요소는 다 갖췄네. 그래 이 정도 쯤이야. 5층까지 두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올라가보자.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예측할 수 없는 두툼한 철문이 힙한 가게의 상징이지.




역시나 전혀 다른 공간이 나타났다. 깔끔하고 감각적인 빈티지 셀렉숍이었다. 이곳을 꼭 와보고 싶었다. 내가 생각하던 빈티지숍과는 너무나도 다른 결이라 신선했다. 이런 게 바로 빈티지를 더 느낌 있게 즐기고 소비하게 해줄 포인트가 된다고 느꼈다.

빈티지숍은 왜 다 빈티지해야 하는가, 빈티지숍은 왜 다 지저분하고 어두컴컴해야 하는가. 왜 다 앤티크로 컨셉을 맞추어야 하는가. 모든 고정관념을 깨주는 곳이었다. 어디선가 물건을 골라 가져오는 걸 '셀렉(select)'이라 한다면 모든 빈티지숍이 셀렉숍에 해당되겠지만 모든 빈티지숍이 셀렉의 정수를 보여주는 건 아니다. 가게의 컨셉과 스타일에 맞게 골라 특유의 조합을 보여주는 게 셀렉숍의 진짜 매력인데 그런 점에서 이곳은 꽤 괜찮은 셀렉숍이었다.




캐주얼한 맨투맨과 볼캡, 청바지 등의 데일리 아이템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빈티지 쇼핑에서 빈티지를 빼고도 그냥 '쇼핑'하기에 좋은 공간이었다. 새 물건을 파는 다른 가게들과 경쟁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이런 곳이 많아진다면 정말로 빈티지가 패션을 구할 수도 있을 텐데. 아니 세상을 구하는 건가.

화사에서 차장이 된 곰돌이 같은 남편에게 어울리는 아이템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다음 여행엔 꼭 데리고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뭐라도 사줘야지' 그런 마음.



다음은 국제 시장 골목 안쪽에 '컷어대쉬(Cut a  Dash)'. 페어플레이보다는 좀 더 많이 봐왔던 익숙한 빈티지 가게의 느낌이었다. 캐주얼한 남성 캐주얼 위주의 아메리칸 빈티지 느낌. 이곳의 장점은 중저가에 괜찮은 퀄리티의 기본 아이템들이 다양한 컬러와 패턴으로 구비되어 있다는 점이다. 물론 빈티지가 취향인 사람들의 입장에서.



오래된 국제 시장의 구제숍들은 여전했다. 정겹고 좋으면서도 아쉬운 건 분명 이 안에도 괜찮은 물건들이 많을 텐데 그걸 골라내기가 쉽지는 않겠다는 점이었다. 새 옷이 더 편하고 저렴한 시대에 빈티지가 갖는 경쟁력에 대해, 지속 가능하게 살아남는 법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앤티크 감성이 뿜뿜하던 '엄마의 서랍장'은 뭔가 연남동 스타일 같으면서도 부산스러움이 교차되는 것 같았다. 여성적이라는 표현 싫어하지만 여성스러운 취향에 맞는 옷과 액세서리들이 많았다. 그리고 일부 장갑이나 모자는 새 상품들도 있었다.



이 엽서를 살까 말까 고민했었는데 '로컬스러움'이 잘 숨겨져있는 듯해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안 샀는데 살 껄 그랬나.




'엄마의 서랍장' 바로 건너편에 위치한 이 작고 복잡스러운 간판도 없는 가게는 무심코 들어갔다 범상치 않은 매력에 빠져들고 말았다. 오래된 도장과 아메리칸 빈티지 잔 '파이어 킹'을 떠올리게 하는 컵들을 보고 '아 여긴 진짜구나'하고 생각했다. 대충 예쁘고 잘 팔릴만한 것들을 헐겁게 가져다 놓은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오래된 흔적이 담긴 물건들처럼 보였다.

패치워크로 만든 자체 제작 천 가방은 그 디테일에 경악을 금치 못했는데 예뻐서 마음에 들기도 했지만 그 태도에 매료되었다. 아무거나 잘 팔릴만한 걸 가져와서 어떻게든 많이 팔려는 의도가 전혀 없어 보이는 물건들만 가득한 공간이었다. 물건을 만들고 구매하고 사용하는 생애 주기를 허투루 여기지 않고 오래오래 아껴주는 마음들로 가득한 세상이 된다면 애초에 코끼리가 쓰레기를 먹을 일도, 거대한 옷 쓰레기 산을 마주할 일도 줄어들지 않을까. 



빈티지는 오래될수록 빛을 발한다. 그 빛은 시간이 흐르며 빛을 달리하다 어떤 누군가에게 전혀 다른 이야기로 다가간다. 빈티지숍들은 남들이 그냥 지나칠법한 원석들을 모으고 모아 다르게 보이도록 조합하고 포장하는 역할을 한다. 각자의 해석이 중요해진 시대에 빈티지가 가지는 힘 역시 보여주는 방식인 것 같다. 자기만의 방식. 

새롭게 만든다고 더 새로운 건 아닐지도 모르겠다. 내게는 영감으로 가득한 시간이었다. 쉽게 쓰고 버릴 것들을 보는 즐거움은 가볍고 금세 흩어지지만 이야기와 시간이 담긴 것들은 묵직하게 다가와 오래도록 머무른다.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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